역지빙례(易地聘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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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순조 11) 일본 대마도에서 있었던 통신사 빙례(聘禮).

개설

조선후기 열두 차례의 통신사행 중 11차까지는 대체로 덕천막부(德川幕府, [도쿠가와 바쿠후])의 정치적 거점이자 일본의 정치·경제적 중심지였던 강호(江戶)에서 국서 교환 빙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811년에는 장소를 바꾸어 일본의 대마도에서 교빙(交聘)이 이루어졌으므로 역지빙례(易地聘禮) 혹은 역지통신(易地通信)이라 칭하였다. 이 빙례는 조선후기 260여 년 동안의 대일외교사에서 마지막 통신사 빙례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1. 역지빙례의 배경

1786년 일본의 10대 장군 덕천가치(德川家治,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사망하고, 1787년 그의 양자인 덕천가제(德川家齊,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장군(將軍, [쇼군])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새로운 장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조선통신사는 적어도 2~3년 안에 파견되는 것이 관례였다. 일본 대마번(大馬藩)에서도 항례(恒例)에 따라 조선에 통신사의 내빙을 요청하였으며, 조선 역시 해당 절목(節目)을 마련하고 예물을 준비하는 등 전례에 따라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788년 일본 막부는 갑자기 대마번에 빙례를 연기하도록 조선 측과 교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막부에서 빙례 연기를 주도한 송평정신(松平定信, [마츠다히라 사다노부])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서민들이 곤궁하고 교통의 요지가 쇠퇴하여 접대를 담당하는 대명(大名, [다이묘])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실제 일본에서는 1783년 이래 소위 천명(天明, [덴메이]) 대기근이 계속되었으며, 1786년에는 강호와 동북 지역에서 대홍수를 비롯하여 전국적인 대흉작 때문에 수확이 1/3로 감소되는 실정이었다. 그 결과 각지에서 폭동과 쌀 소동이 일어나는 등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백성 구제라는 커다란 현안을 앞두고 막대한 재력을 기울여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막부의 판단이었다. 조선은 처음에는 막부의 연기 요청을 거부하였으나,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정조(正祖)의 뜻에 따라 연기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791년(정조 15) 막부에서는 빙례 연기에서 더 나아가 역지빙례안을 제시하였다. 막부가 조선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역지빙례를 추진한 데에는 통신사 접대에 막대한 경비가 지출된다는 경제적 이유가 제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18세기 이래 막부 안에서 조선에 대한 인식 변화가 나타난 것이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였다.

18세기 초 일본 막부 내에서는 신정백석(新井白石, [아라이 하쿠세키])에 이어 중정적선(中井積善, [나가이 치쿠잔]) 등에 의하여 조선이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원정 이래로 일본에 조공을 바친 국가라는 것, 지금은 비록 속국이 아니라 해도 천하의 재물을 기울여 응접할 필요는 없다는 것 등 조선을 가볍게 보거나 멸시하는 인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동아시아 사회가 안정되면서 조선 통신사행이 막부 장군의 위상에 국제성을 더하게 된다는 필요성도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에 역지빙례안은 일본에서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막부의 의사는 곧바로 조선에 전해졌다. 처음 조선에서는 선례가 없는 일이라 해서 역지빙례의 뜻을 전하는 일본 측 서계(書契)의 접수마저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도 통신사 일행이 강호까지 가게 되면 그만큼 많은 경비를 부담해야 하였고, 예단으로 가져가는 물품을 마련하는 일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통신사 일행의 인원, 예물, 접대 비용 따위를 줄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일본의 역지빙례 요청을 신중하게 고려해 볼만 하였다. 한편 일본과 조선의 외교 교섭 사무를 맡고 있던 대마번에서는 막부의 방침을 지지하는 대삼(大森, [오모리])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역지빙례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2. 역지빙례의 교섭

조선 조정과 덕천막부, 그리고 대마번 사이에 공통분모가 형성되어 마침내 역지빙례가 실현되기는 하지만, 계획에서 실시까지는 약 20년에 달하는 오랜 교섭이 있었다. 처음에는 연빙(延聘) 파기에 대한 조선의 불신을 비롯하여 의례 개혁 자체에 대한 거부감, 대마번의 외교문서 위조와 관련된 역관(譯官)의 뇌물 수수사건 등 대마번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여 역지빙례의 교섭이 원활히 진행될 수 없었다.

그러나 1798년 막부는 대마도 번주에게 역지빙례 의사를 전달하였으며, 1804년에는 5년 후 역지빙례를 실시할 것을 명하였다. 이 사실은 대마도를 통하여 조선에 전해졌고, 막부의 서계 또한 조선에 전달되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강정역관(講定譯官)을 일본 대마도에 파견하여 역지빙례 실시를 위한 구체적인 실무 교섭을 벌인 후, 강정역관이 귀국하여 일본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 안건을 조정과 상의한 뒤 그 결과를 가지고 왜관(倭館)에서 일본을 상대로 마지막 교섭을 벌이고자 하였다.

이에 1809년(순조 9) 문위 당상역관현의순(玄義洵), 당하역관변문규(卞文圭), 면담 당상역관최석(崔昔) 등 강정역관 일행이 대마도에서 교섭하고 돌아왔다. 이 교섭 과정에서 조선은 역지빙례가 막부의 방침이라는 것, 일본의 재정적 어려움이 심각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귀국 후 조선에서는 역관 일행의 보고를 토대로 하여 강정역관과 대마번 가로(家老) 사이의 협정안에 기초하여 통신사행 절목을 정하기로 하였다.

1810년 강정역관에 현식(玄烒)을 임명하고 이어서 현의순을 별견강정역관에 임명하여 왜관에서 마지막 협상을 벌이도록 하였다. 대마도와 왜관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교섭에서는 통신사 접견, 국서·서계의 교환과 관련된 의식이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그 결과 장군의 칭호는 대군(大君)으로 하였으며, 양측에서는 모두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만을 보내되, 인원은 350명 이내로 하여 규모를 줄일 것을 결정하였다. 예물 역시 장군을 제외한 어삼가(御三家), 노중(老中)의 것은 모두 폐지하고, 사신의 사적인 예단도 생략하기로 하였다. 조선에서 파송되는 기선(騎船)과 복선(卜船)의 숫자도 각 2척으로 감해졌다.

3. 역지빙례의 실시

조선 통신사는 정사 정3품 이조참의김이교(金履喬), 부사 종3품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이면구(李勉求)를 비롯하여 모두 328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811년 3월 29일 대마도 부중(府中)에 도착하였다. 일본 측 정사 오가사와라 다다카타[小笠原忠固], 부사 협판안동(脇坂安董, [와키사카 야스타다])을 비롯한 일행들은 4월 15일에 도착하였다.

빙례는 대마번주의 저택에서 행해졌는데, 국서 전달식을 비롯하여 모두 네 차례의 외교 의례가 있었다. 제일 먼저 막부의 상사가 통신사의 객관을 방문하여 장군의 뜻을 대신 전하는 객관위로의(客館慰勞儀)가 있었으며, 이어서 대마번주의 거성에서 조선 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 대마번주가 베푸는 향연인 사연의(賜宴儀), 대마번주 거성에서 막부의 답서를 받아오는 수답서의(受答書儀)가 있었다. 이어 통신사는 6월 25일에 대마도를 떠났고 7월 27일 한성으로 돌아와 순조에게 복명하였다. 덕천가제(德川家齊) 장군에 대한 일본 사신의 복명은 8월 15일에 있었다.

역지빙례의 목적대로 일본 측에서는 통신사 빙례에 따르는 비용의 절감이 이루어졌다. 역지빙례를 위하여 대마번에서는 객관의 신축, 관사(館舍) 수리, 항구·도로의 정비 등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빙례가 대마도에서 막부로부터 역할을 위임 받아서 치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비용 부담은 모두 막부의 재정 원조로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통신사 빙례에 들었던 체재 비용을 그 이전의 1763년 계미사행과 비교하면 약 1/4 이상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비용 절감에서도 많은 성과가 있었다. 이는 사행 과정에서 양국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 주는 데 기여하였다.

의의

1811년 역지빙례 이후 일본에서는 약 60년에 걸쳐 4명의 장군이 더 교체되었지만 통신사의 내빙은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1858년에 14대 장군직을 세습한 덕천가무(德川家茂,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1876년 대마도에서 역지빙례를 하기로 합의했지만, 1866년에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그리고 1867년 15대 장군 덕천경희(徳川慶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大政)을 봉환(奉還)함으로써,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가 탄생하고 덕천막부는 소멸되고 말았다.

조선통신사가 단절된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중정적선이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은 신공황후 이후 일본에 복종하여 조공을 바친 국가라는 인식이 국학 사상과 결합되어 널리 확산되었고, 명치시대 초기의 정한론(征韓論)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하였다는 신화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재흥을 꿈꾸는 등 침략성이 증폭되었다. 이러한 인식들은 일본의 국사 교육을 통하여 근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

참고문헌

  • 강재언, 『조선통신사의 일본 견문록』, 한길사, 2005.
  • 미야케 히데토시[三宅英利] 지음, 김세민 옮김, 『조선통신사와 일본』, 지성의 샘, 1996.
  •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 이원식, 『조선통신사』, 민음사, 1991.
  • 이훈, 「조선통신사 접대와 대마번의 재정」, 『역사와 경계』 55, 2005.
  • 정성일, 「역지빙례 실시 전후 대일무역의 동향」, 『경제사학』 15,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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