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향청(糧餉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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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훈련도감의 군수물자를 관장하는 재정 기관.

개설

양향청은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에게 급료를 지급하고 훈련도감 운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던 기관이었다. 그러나 정치·군사·경제 등의 권한 집중을 피하였던 조선의 국정 원리에 따라 양향청은 훈련도감에 속해 있으면서도 군사를 담당하던 훈련도감보다는 재정을 담당하던 호조(戶曹)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10월 정부에서 급료병제로 운영되는 훈련도감을 창설한 후, 훈련도감 군인들에 대한 급료와 각종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하여 양향청을 설립하였다. 양향청은 처음에는 군향청(軍餉廳)이라고도 하였는데, 정확한 설립 날짜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다만 『만기요람(萬機要覽)』,『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서는 훈련도감의 설치와 동시에 설립되었다고 보고(기록하고) 있다.

조직 및 역할

양향청은 훈련도감의 군수물자를 관장하는 기관이지만, 호조 판서가 제조(提調)가 되어 실제 운영을 담당하였다. ‘재상(宰相)은 군사(軍事)를 관장하고, 대장(大將)은 군병(軍兵)을 통솔하며, 호조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것[相臣領其事 大將治其兵 度支制其財]’이 조선시대 군사 운영의 원칙이었다. 정치·군사·경제 등의 권한이 한곳에 집중하면 지나치게 권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취한 조치였다. 이러한 권력 분립의 원칙에 따라 양향청은 비록 훈련도감의 재정을 전담하는 기관이지만 그 운영은 호조 판서가 관할하였다. 즉, 양향청에는 도제조(都提調) 1명, 제조 1명, 겸제조(兼提調) 2명, 낭청(郎廳) 1명의 관원을 두었다.

도제조는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하는 의정 1명이 겸임하였고, 제조는 호조 판서가 겸임하였으며, 겸제조는 훈련대장과 병조 판서가 당연직(當然職)으로 겸임하였다. 낭청은 처음에는 훈련도감에서 따로 임명하여 보고하였으나, 1672년(현종 13)에 호조 별영랑(別營郞)이 겸임으로 하는 것으로 정하였고, 1745년(영조 21)에 종사관(從事官)으로 개칭하였다. 양향청에 소속된 관리로는 호조에서 파견한 계사(計士) 1명, 서리(書吏) 4명, 고직(庫直) 1명, 사령(司令)·문서직(文書直)·군사(軍士) 8명을 두었다.

변천

임진왜란 중 정부는 급료병제로 운영되는 훈련도감이 설립되자 군인에게 지급할 급료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1595년(선조 28)부터 훈련도감 군인의 급료를 이원화하여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훈련도감 군인 내에서 군공(軍功)이나 시재(試才) 등으로 금군(禁軍)에 제수되는 사람이 다수 생기자 금군의 급료는 호조에서 지급하고, 품계가 없는 한량의 급료는 군향청(양향청)에서 지급하였다(『선조실록』 35년 윤2월 1일).

급료는 금군이 1개월에 쌀 12말을 받았고, 한량은 6말을 받았다. 그러나 훈련도감 군인 중에서 군공이나 무과(武科) 등을 통하여 금군으로 승진하는 사람이 계속 증가하자 이들의 급료를 책임져야 할 호조의(에서는) 재정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정부는 새로운 조세를 설정하여 군인들의 급료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즉, 1602년(선조 35) 도감군의 급료를 지급할 목적으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 도의 전결(田結)에서 세금을 거두는 삼수미세(三手米稅)를 창설한 것이었다(『선조실록』 39년 9월 22일).

삼수미세의 창설 이후 도감군의 급료는 호조와 양향청에서 나누어 지급하던 데에서 호조가 총괄적으로 담당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종래 한량의 급료를 지급하던 양향청은 훈련도감의 둔전(屯田)을 접수하여 훈련도감 군인의 급료를 제외한 훈련도감 운영에 필요한 각종 재원을 마련하는 기관으로 전환되었다.

임진왜란 중 훈련도감은 막대한 규모의 둔전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정부 관료들은 시정을 촉구하였다. 1596년(선조 29) 6월 영사(領事)김응남(金應南)은 훈련도감 군인의 급료는 호조와 양향청에서 지급하고 있는데, 훈련도감 둔전의 소출은 무엇에 사용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이것을 모두 양향청으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부 관료들의 주장에 따라 훈련도감 둔전은 삼수미세가 창설되었을 때 양향청으로 귀속되었다. 훈련도감 둔전을 접수한 이후 양향청은 훈련도감 군인의 급료를 제외한 훈련도감 운영에 필요한 각종 군수 재원을 마련하는 기관으로 전환되었다. 이때 양향청이 접수한 훈련도감 둔전의 총계는 4,496결(結) 30부(負) 7속(束)에 달하였다.

그런데 비록 양향청이 훈련도감에 군수를 조달하는 기관이라고는 하지만 양향청은 호조 판서가 제조(提調)를 예겸(例兼)하는 기관이어서 훈련도감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훈련도감과 양향청은 ‘양향청과 훈국은 다르다(糧餉廳與訓局有異)’ 하여 전혀 별개의 기관이라고까지 주장되었다(『영조실록』 9년 9월 5일). 따라서 양향청으로 둔전을 모두 넘겨준 이후 훈련도감이 받은 경제적 타격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재정 궁핍으로 곤란을 겪던 훈련도감은 곧바로 양향청과는 별도로 둔전을 다시 확보하였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종수, 『조선 후기 중앙 군제 연구: 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 변동』, 혜안,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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