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종침(沈宗忱)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53년(명종 8)~1614년(광해군 6) = 6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사섬시(司贍寺)참봉(參奉)과 안음현감(安陰縣監),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역임하였다. 자는 사성(士誠)이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감찰(監察)을 지낸 심금(沈錦)이고,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관(判官)민희열(閔希說)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심광언(沈光彦)이고, 할아버지는 안성군수(安城郡守)를 지낸 심빈(沈濱)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청성백(靑城伯)심덕부(沈德符)의 후손이며, 효종(孝宗) 대에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선조~광해군 때의 활동

심종침(沈宗忱)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다가, 음서(蔭敍)로 사섬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이후 명(明)나라 장수를 위한 접대도감(接待都監) 낭청(郎廳)이 되었다. 이어 그 공로가 인정되어 6품직인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에 임명되었다가, 은진현감(恩津縣監)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은진(恩津)에 반란의 경계가 있다고 하여 현감을 무인(武人)으로 교체하였고, 이에 1600년(선조 33) 심종침은 안음현감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관직을 사직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3년 2월 20일, 『청음집(淸陰集)』 권32 「숙천부사심공휘종침묘갈명(肅川府使沈公諱宗忱墓碣銘)」] 그러다가 1604년(선조 37) 익위사(翊衛司) 익위(翊衛)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선조 37년 윤9월 10일] 그리고 이듬해인 1605년(선조 38) 심종침은 군기시(軍器寺)첨정(僉正)을 거쳐 임천군수(林川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전임 군수의 잉임(仍任)으로 부임하지 못했다.[『선조실록』선조 38년 2월 7일] 이어 여산군수(礪山郡守)에 임명되었으나, 파직되어 돌아왔다.[『청음집』 권32 「숙천부사심공휘종침묘갈명」]

이후 사간원(司諫院)에서 문관보다 음관(蔭官)이 더 많이 기용되는 것을 문제 삼으면서, 3품인 숙천부사(肅天府使)에 제수된 심종침의 체차를 요구하자 광해군이 이에 따랐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1년 11월 1일] 그리고 1612년(광해군 4)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에서 또다시 음관을 당상으로 올리는 일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남발되고 있다며 이에 대한 개정을 요구하였는데, 심종침도 음관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번에는 이전의 예에 따른 것이라며 사간원의 의견을 반대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4년 3월 26일, 광해군 4년 3월 27일, 광해군 4년 3월 29일] 이후 심종침은 자산군수(慈山郡守)에 임명되었으며, 궁궐도감(宮闕都監) 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당상관(堂上官)의 품계가 주어졌다.[『청음집』 권32 「숙천부사심공휘종침묘갈명」]

그리고 얼마 뒤 파직되어 돌아오다가 황주(黃州)에 이르렀는데, 마침 동생 심종직(沈宗直)이 황주통판(黃州通判)으로 있었다. 심종직은 형이 더위에 길을 떠나는 것을 걱정하여 가을에 낙향하도록 권하였는데, 얼마 후 심종침이 병이 나서 여사(旅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1614년(광해군 4)으로 64세였다.[『청음집』 권32 「숙천부사심공휘종침묘갈명」]

성품과 일화

심종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는데, 계모(繼母)의 상을 당했을 때는 시묘살이를 하면서 예를 다했다. 또한 어려서부터 자신을 키워준 계부가 세상을 떠나자, 마치 친부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다고 한다. 노년까지도 동기간의 우애가 지극하였고, 세간에서는 일족(一族)을 보살피는 데는 아무리 천하더라도 빠뜨리지 않았다하여 더욱 칭찬하였다.[『청음집』 권32 「숙천부사심공휘종침묘갈명」]

후손 및 묘소

심종침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은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고려 때 시중을 지낸 우현보(禹玄寶)의 후손이다. 그녀는 심종침보다 4살 연상으로 1624년(인조 2)에 세상을 떠났다. 단양 우씨의 묘소는 심종침의 묘의 왼쪽에 있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심설(沈偰)은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을 지냈다. 심설은 종실(宗室)인 청원도정(靑原都正)이간(李侃)의 딸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혼인하여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효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고, 심지원의 아들 심익현(沈益顯)은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와 혼인하였다. 차남인 심석(沈)은 선공감(善工監) 감역(監役)을 역임하였고, 군수유순(柳楯)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 2녀를 두었다. 또한 1녀는 이집(李潗)의 처가 되었는데, 나머지 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청음집』 권32 「숙천부사심공휘종침묘갈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음집(淸陰集)』
  • 『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