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沈尙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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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80년(숙종 6)~1721년(경종 1) = 42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 자는 성응(聖凝)이며, 호는 몽오재(夢悟齋)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심즙(沈楫)이고, 어머니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유심(柳淰)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를 지낸 심지치(沈之治)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유릉참봉(裕陵參奉)을 지낸 심준(沈僔)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99년(숙종 25)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709년(숙종 35) 반제(泮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1710년(숙종 36)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35년 9월 9일, 『방목(榜目)』] 1713년(숙종 39)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천거되었으며 1716년(숙종 42)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병조 좌랑(佐郞)으로 옮겼고, 6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숙종실록』숙종 42년 6월 11일, 『몽오재집(夢悟齋集)』「심상정행장(沈尙鼎行狀)」 이하 「심상정행장」으로 약칭]

한편 1712년(숙종 38) 과옥(科獄 :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로 일어난 옥사)이 일어나 시관(試官)이었던 이돈(李墩)이 당인(黨人)들의 무고를 당하고 유배를 가서 죽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1716년(숙종 42) 숙종이 다시 사문(査問)을 명하여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때 앞서의 무고한 단서가 드러나려고 하는 찰나에 시의(時議)가 갑자기 변하여 뜻밖에 사문하던 것을 중지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심상정과 대사간(大司諫)윤성준(尹星駿)이 “(임진년 과시(科試)에 관한 사문은) 말이 원한에서 나오고 증언은 어리석은 아이들에게서 이루어져서 조정의 평의(評議)가 마땅함을 잃어 여론이 다 분개합니다.”라고 하며 사문을 계속 이어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말이 당시의 휘기(諱忌)에 크게 저촉되었으므로, 심상정은 사천현감(泗川縣監)에 보임되었다가, 그해 10월 건강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다.[『숙종실록』숙종 42년 6월 14일, 숙종 42년 7월 6일, 숙종 42년 10월 27일, 「심상정행장」]

심상정은 이후 임천군(林川郡)의 묘하(墓下)로 돌아가 독락정(獨樂亭) 옛터에 초가를 짓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평소 허약하여 병에 잘 걸리는 체질이었는데 사천에 내려가 있을 때 장기(瘴氣)가 습하여서 수토(水土)에 맞지 않았으니 차츰차츰 쇠약해지다가 결국 1721년(경종 1) 3월 9일 병이 중해져 사망하였으니 향년 42세였다.[「심상정행장」]

문집으로는 4권 2책의 『몽오재집(夢悟齋集)』이 있다. 1735년(영조 11)경 이숙겸(李叔謙)과 이거원(李巨源) 등이 간행하였으며, 권두에는 윤순(尹淳)과 이덕수(李德壽)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거원의 발문이 있다. 권1∼3에는 시 160수, 권4에는 상소와 계사, 그리고 제문 등이 실려 있고, 부록으로 심상정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심상정은 특히 시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므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역시 시이며, 만년의 작품이 많다. 이는 그가 말년에 임천군에 은거하면서 시작(詩作)으로 소일하였기 때문이다. 운조(韻調)가 청초하고 조어에 능하였다는 평을 받았으며, 모방에서 벗어난 독창성이 돋보인다.

성품과 일화

심상정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어릴 적부터 밝게 빼어나고 영특하여 세상 사람들이 신동이라 칭하였다. 네 살 때 이미 책을 읽을 줄 알았다. 일곱 살 때에는 이희룡(李喜龍)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명되어 송별회를 가지자, 심상정도 부친과 함께 송별회 자리에 참석하여 송별의 시를 지었다. 이때 이희룡이 어린 심상정을 크게 칭찬하였다.[「심상정행장」]

소탈하면서 기개가 있고 절개가 굳어 굽힘이 없어 남의 허물은 용납하지 않았고, 더욱이 시비를 가려 분석하고 선악을 변별하기에 뛰어나서 마치 칼날로 자르고 촛불로 비추어 보듯 하였다. 심상정이 죽은 후 식자(識者)들은 만약 심상정이 살아 있었다면 성쇠가 격발하는 즈음에 의론(議論)과 풍절(風節)에 볼만한 것이 반드시 많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심상정은 사천현감으로 있을 때 늘 병으로 누워지내면서도 경계를 정해 질서 있게 다스렸으므로, 향리(鄕吏)들은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그를 깊이 사모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사후 사천에는 그의 일화가 적힌 거사비(去思碑 : 선정(善政)을 편 지방관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세워졌다. [「심상정행장」]

한편 심상정이 꿈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손바닥에 ‘오(悟)’자를 써주었으므로, 호를 몽오재라 하였다 전해진다.[「심상정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남도 임천군(林川郡) 표곡(瓢谷)의 선영(先塋)에 있으며, 부인과 상하분(上下墳)을 썼다.[「심상정행장」]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지(權持)의 딸이며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심철(沈喆)과 심혁(沈赫)이고, 장녀는 윤동의(尹東儀)에게, 차녀는 이정상(李定相)에게 시집갔다.[「심상정행장」]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몽오재집(夢悟齋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심상정행장(沈尙鼎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