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진(宋希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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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0년(선조13)∼1641년(인조19) = 62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자는 퇴지(退之)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인데, 충청도 회덕(懷德) 송촌(宋村) 출신이다. 아버지는 송담(松潭)송남수(宋枏壽)이고, 어머니 진주유씨(晉州柳氏)는 유형필(柳亨弼)의 딸이다. 군수송세훈(宋世勛)의 손자이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송희원(宋希遠)의 동생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3년(선조36) 나이가 24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는데, 광해군의 정치가 점차 혼미를 거듭하자,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아버지 권유로 음보(蔭補)로 봉선전(奉先殿)참봉(參奉)을 맡았다. 1626년(인조4)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치고 현릉(顯陵: 문종 왕릉)과 목릉(穆陵: 선조 왕릉)의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1631년(인조9) 52세에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여 실록(實錄)을 편찬하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635년(인조13) 사헌부에 들어가서 지평(持平) · 장령으로 승진하였고, 또 사간원에 들어가서 정언(正言) ·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다. 성균관의 직강(直講) · 사예(司藝)를 거쳐,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역임하였다. 그의 형 송희원처럼 늦게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그는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直言)을 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1636년(인조14) 경상도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그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경상도관찰사를 따라 행재소(行在所)로 향하던 중,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포위되어 청(淸)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을로 돌아왔다. 곧바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회덕의 송촌으로 돌아와서 은거하다가, 1641년(인조19) 2월 10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62세였다.

인조와의 갈등 관계

사헌부에 있을 때 인조가 아버지 원종(元宗)을 추숭(追崇)하려고 하였는데, 그는 이에 반대하던 신하를 두둔하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아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1635년(인조13) 원종(元宗)의 부묘례(祔廟禮)에는 대축관(大祝官)으로 정성을 다해 인조에게 반숙마를 하사 받았다. 1636년(인조14) 병조 판서이성구(李聖求)가 나이 70이 넘은 노인인 이엄(李淹)을 위급한 때를 대비해 신설한 영장(營將)으로 천거하자, 그는 그 부당함을 거론하고 이를 교체하도록 주장하였다. 마침 이엄이 면직되고자 했기에 송희진이 사정(私情)을 따라 논핵하여 이엄이 체직된 것이 아닌가 하고 병조 판서가 의심하였다. 인조는 병조 판서의 말을 듣고 그를 하옥(下獄)시켜 심문하려고 하였다. 신하들이 모두 그를 용서하도록 간청하였으나, 인조의 노여움이 여전히 풀리지 않아서, 결국 청하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성품과 일화

송희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겉으로는 온화하고 단아하였으나, 속으로는 강직하였다. 아버지 송남수는 나이 80세가 넘어도 건강하여, 고향땅에서 자식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막내로서 나이가 50세에 가까웠으나 어린아이처럼 아버지를 즐겁게 하였다. 형 송희원 · 송희건과 자제, 조카들과 함께 한집에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는데, 형제가 날마다 아버지 곁에서 시중들면서 말과 낯빛을 부드럽게 가다듬고 아버지를 받들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효성을 칭송하였다.

고향의 옛집이 송유(宋愉)의 사당인 쌍청당(雙淸堂) 옆에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종족(宗族)들이나 옛날 친구들과 함께 그 아래를 거닐면서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되새겼다. 향리에 정광필(鄭光弼) · 김정(金淨) · 송인수(宋麟壽) 3인의 유학자를 추모하는 삼현서원(三賢書院: 숭현서원)이 있었는데, 그가 서원의 훈장이 되어 매달마다 친척의 자제들을 모아서 『소학(小學)』을 강론하고 글을 써서 후학들을 경계하였다. 그 후진(後進)의 자제들 중에서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처럼 출세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의 묘원(墓原)에 있는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참봉정융(鄭烿)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음집(淸陰集)』
  • 『계곡집(谿谷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사록(海槎錄)』
  • 『송애집(松崖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창주유고(滄洲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