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요년(宋遙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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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9년(세종11)∼1499년(연산군5) = 71세]. 조선 전기 단종∼연산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기수(期叟)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지평(持平)송계사(宋繼祀)이고, 어머니 순천김씨(順天金氏)는 판서김종흥(金宗興)의 딸이다. 회덕에 처음으로 자리잡은 쌍청당(雙淸堂)송유(宋愉)의 손자이고, 송준길(宋浚吉)의 5대조이다.

단종~연산군 시대 활동

1453년(단종1) 나이 25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하였다. 어머니의 독촉으로 음보(蔭補)로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변정원(辨定院) 사의(司議)로 승진하였다. 청주판관(淸州判官)으로 나갔다가, 상의원(尙衣院) 판관(判官)으로 전임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면천군수(沔川郡守)로 나갔다가,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에 임명되었다. 1460년(세조6) 별좌(別坐)로 있을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1479년(성종10)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51세였다. 사옹원(司饔院)정(正)에 임명되었다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 1486년(성종17)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임명되었다가, 제용감(濟用監) 정으로 전임하였고, 예빈시(禮賓寺) 정을 거쳐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나갔다. 군자감(軍資監) 정에 임명되면서 교서관(校書館) 판교(判校)를 겸임하였다. 1498년(연산군4) 연산군의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을 때, 죄수들을 용서하는 사유문(赦宥文)을 가지고 충청도로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병석에 있다가 1499년(연산군5) 9월 23일 죽으니, 향년이 71세였다.

흉년 때 진휼 활동

1482년(성종13)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있을 때 흉년을 구제하라는 양곡(糧穀)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아 아사자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장형(杖刑) 70대의 형벌을 받았다. 그는 이때에 흉년 때 진휼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달았던 같다. 1486년(성종17) 충청도진휼사(忠淸道賑恤使)유순(柳洵)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충청도에서 진휼 활동을 하다가 유순과 함께 그의 고향 회덕의 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셨다고 추국(推鞫)을 당하였다. 영사(領事)노사신(盧思愼)이 변호하자 성종이 용서하고 곧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임명하였다. 제용감 정이었을 때, 팔도에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진휼사를 파견하면서 청렴하고 근면하며 수완이 있는 사람을 종사관으로 선발하였는데, 송요년이 제일 먼저 뽑혔다. 이것을 보면, 그가 진휼 활동에 적극적이고 조직적이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원한 공로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품과 일화

송요년의 마음가짐은 굳고 확실하였으며 처사는 정밀하고 민첩하였다고 한다. 그는 벼슬에 있을 때 청렴하고 근신하였으며, 집을 다스리는 데는 법도가 있었고, 친척과 동료들을 항상 신의로써 대하였다고 한다.

1479년(성종10) 나이 51세 때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그의 사위 강귀손(姜龜孫)도 같이 합격하였다. 장인과 사위가 동방급제(同榜及第)한 것은 옛날부터 아주 드문 일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축하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회덕 식장산(食藏山)에 있는데, 그의 동료 용재(慵齋)성현(成俔)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부인 나주김씨(羅州金氏)는 판관김양(金壤)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여림(宋汝霖)은 고산현감(高山縣監)을 지냈고, 외동딸은 판서진원군(晋原君)강귀손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점필재집(佔畢齋集)』
  • 『저헌집(樗軒集)』
  • 『사숙재집(私淑齋集)』
  • 『나재집(懶齋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