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사(小通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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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하급 통역인.

내용

소통사는 조선시대에 통역 및 기타 실무에 종사하였던 하급의 통역인이었다. 조선 초부터 소통사에 관한 기록을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체계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다만 『증정교린지』에 왜관(倭館)의 소통사를 설명하는 가운데 ‘처음에는 왜학생도(倭學生徒)로 칭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사역원(司譯院) 관직을 소유한 역관(譯官)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소통사의 선발과 정원, 급료, 역할 등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증정교린지』에 의하면, 왜관에 근무하는 소통사의 선발 대상은 소동(小童) 및 관직(館直)이었다. 인원은 1703년(숙종 29) 35명이었다가, 1739(영조 15)에 30명으로 정해졌다. 이때 급료 규정도 함께 정해져서 소통사는 매달 초하루에 요미(料米) 6두(斗)를 지급받았다.

소통사의 업무는 주로 외임역관(外任譯官)이 파송되지 않은 곳에서의 통역, 부경사행(赴京使行)·통신사(通信使) 수행, 사신관(使臣館)이나 왜관에서의 의례·사무·기타 잡무 처리 등이었다. 『증정교린지』에 의하면, 조선후기 왜관에 근무하였던 소통사는 수통사(首通事)·장무통사(掌務通事)·훈도·별차배통사(訓導別差陪通事)·서기통사(書記通事)·수문통사(守門通事)·설문통사(設門通事)·거리통사(巨里通事)·호방통사(戶房通事)·5일통사(五日通事) 등 업무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성명을 기록한 선생안(先生案)을 작성하였으며, 통사청(通事廳)이라고 하는 독립된 업무 공간도 가지고 있었다.

용례

(都提調徐)命均曰 胡書以火箭射送 而江邊則無譯舌 不知字音 不能解釋其爲何語 依領相沈壽賢之意 擇送譯官解淸語者一人好矣 上曰 不必譯官 江邊列邑各置小通事三人可矣(『영조실록』 9년 7월 24일)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김동철, 「17~19세기 동래부 소통사의 편제와 대일활동」, 『지역과 역사』 17, 2005.
  • 양흥숙, 「17~18세기 역관의 대일무역」, 『지역과 역사』 5, 1999.
  • 백옥경, 「조선전기 역관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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