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징(成虎徵)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25년(인조3)∼1694년(숙종20) = 70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병여(炳如)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령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성운한(成雲翰)이고, 어머니 원주원씨(原州元氏)는 원진해(元振海)의 딸이다. 성희안(成希顔)의 4촌 성희혁(成希赫)의 5대손이고, 사헌부 지평(持平)성호신(成虎臣) · 현감성호상(成虎祥)의 형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66년(현종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의정부 사록(司錄)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승진되었고, 예조 · 병조의 좌랑을 거쳐,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나갔다가, 함경도도사(咸慶道都事)로 옮겼다. 1672년(현종13) 사헌부 지평을 거쳐,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고,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1673년(현종14) 민정중(閔鼎重)이 죄를 지어 벌을 받자, 서인(西人) 김만중(金萬重) · 이숙(李䎘) · 이선(李選) 등이 그를 구원하다가 서로 잇따라 유배당하였다. 그는 정언으로서 대청(臺廳)에 나아가서 이들을 변론하고, 민정중을 삭직(削職)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啓請)하였다. 현종이 진노하여 “민정중에게 아부하고 군부(君父)를 멸시한다.”고 하고, 그를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하였다. 1674년(현종15) 우의정김수흥(金壽興)이 그를 구원하여 1년 반 만에 유배생활에서 풀려났다.

숙종 시대 활동

숙종 즉위와 동시에 남인과 서인이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이자, 그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1678년(숙종4)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마쳤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 남인 출신의 영의정허적(許積)이 죽음을 당하고 남인 윤휴(尹鑴) 등이 쫓겨났다. 서인 송시열(宋時烈)이 집권하자, 그는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윤휴의 이종사촌 이삼달(李三達)이 윤휴를 도왔다고 탄핵하였다. 사헌부 장령 · 지평으로 승진되었다가,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도내에 으뜸이었다. 1683년(숙종9)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승하하자, 빈전도감(殯殿都監)낭청(郎廳)으로 차출되었다. 1684년(숙종10)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어, “남인 허목(許穆)은 죄가 무거우므로 복관(復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빈전도감의 노고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때부터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서 수년 동안 우부승지 · 좌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고, 그 사이에 병조 · 형조 · 공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1688년(숙종14)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이미 64세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노론이 쫓겨나고 남인이 집권하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출당하고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왕후가 되었으므로, 5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1694년(숙종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집권하자,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노론의 여러 인물들이 거의 유배되어 작고하였다. 또 남구만(南九萬) 등 소론파가 여전히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관직에 적극적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6월에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으나, 점차 병이 깊어져서 그해 12월 12일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향년이 70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호징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훤칠한 키에 외모가 준수하였다. 내면은 엄격하고 씩씩하였으나 겉은 너그럽고 넉넉하여 후덕한 장자(長者)의 면모가 있었다. 그가 대간(臺諫)에 있을 때에는 흔들림 없이 강직한 언사로 여러 번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서 유배를 당하였으나, 조금도 좌절하는 일이 없었다. 노론으로서 당쟁이 가장 심하였던 시기에 30여 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면서, 환난(患難)을 당하면 지조와 행실을 더욱 확고하게 드러내고, 불운(不運)을 당하면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거취를 엄정(嚴正)하게 하였다.

남인 윤휴의 아들 윤의제(尹義濟)는 성호징의 사촌 동서였는데, 윤휴가 사람을 시켜 좋은 벼슬을 줄 테니 한번 만나자고 제의하였으나, 그는 더럽다고 욕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 뒤에 윤휴 집의 여종이 온 것을 보고,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그들과 왕래하지 말라고 금지하였다. 윤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우 성호상(成虎祥)이 공무로 윤휴에게 갔었는데, 윤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자네 형님이 예설(禮說)을 언문(諺文)으로 해석하여 몰래 대비(大妃)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그 죄는 매우 무겁다. 한번 찾아와서 나를 만난다면 그 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한번 윤휴를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을 늦추는 것이 어떠냐고 그에게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연하게 말하기를, “내가 어찌 화를 두려워하여 권흉(權兇)의 대문에 발을 들여놓겠는가? 내가 한번 상소하여 그 간악한 죄상을 열거하고 싶으나, 부모님이 계시므로 그럴 수가 없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굳건한 태도에 감탄하였다. 또한 윤휴도 결국 그를 중상모략하지는 못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金村)의 아버지 무덤 바로 아래에 있는데, 부인이 그 왼쪽에 묻혔다. 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원주변씨(原州邊氏)는 사헌부 장령변호길(邊虎吉)의 딸로,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한수재집(寒水齋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야당유고(野堂遺稿)』
  • 『백호집(白湖集)』
  • 『지호집(芝湖集)』
  • 『성재유고(醒齋遺稿)』
  • 『서파집(西坡集)』
  • 『삼연집(三淵集)』
  • 『지촌집(芝村集)』
  • 『도곡집(陶谷集)』
  • 『서암집(恕菴集)』
  • 『성호전집(星湖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