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구(成俊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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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4년(선조7)∼1633년(인조11) = 60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덕보(德甫), 호는 장곡(藏谷)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경기도 안산(安山) 출신이다. 아버지는 부제학(副提學)성이문(成以文)이고, 어머니 순창조씨(淳昌趙氏)는 사헌부 감찰(監察)조흔(趙昕)의 딸이다. 이조 참판성윤(成倫)의 증손자이고, 병조 정랑성이민(成以敏)의 조카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9년(선조32)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1602년(선조35)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에 임명되었으며 예문관 봉교(奉敎)에 천거되었다. 이듬해 병조 좌랑에 임명되고, 성균관 전적(典籍) ·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이조 좌랑에 발탁되었다. 1605년(선조38)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교리(副校理) · 교리(校理)로 승진하고, 평안도 지방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염탐한 결과를 선조에게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이듬해 이조 정랑에 발탁되고,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 응교(應敎)로 승진하고, 시강원 보덕(輔德)을 역임하였다. 선조 말년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이 정권을 잡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 광해군(光海君)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그 대신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고 하였는데,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은 이를 반대하고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북인(北人)이 세자 책립을 둘러싸고 대북(大北) · 소북(小北)으로 나누어 다툴 때 아버지 성이문이 영의정유영경과 매우 친하였기 때문에 성준구 부자는 유영경의 소북파가 되었다.

광해군 시대 유배생활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정인홍 · 이이첨 등이 권력을 잡았다.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경흥(慶興)에 유배시켰다가 사사(賜死)하고, 성준구를 남해(南海)로 귀양 보냈다가, 이산(理山) · 벽동(碧潼)·양산(梁山) 등지로 이배(移配)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그는 광해군 시대 16년 동안 적소(謫所)를 옮겨 다니면서 유배 생활을 계속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당시 북인(北人)은 대북 · 소북 양당으로 분열되었는데, 대북은 정인홍 · 이이첨 · 이산해(李山海) 등이 중심인물이었고, 소북은 유영경이 7년 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끌어들인 성준구 · 성이문(成以文) 부자와 남이공(南以恭) 등이 핵심인물이었다. 나중에 소북은 유영경을 지지하는 유당(柳黨)과 남이공(南以恭)을 지지하는 남당(南黨)으로 갈라졌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즉시 그는 석방되어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어서 재령군수(載寧郡守) · 서천군수(舒川郡守)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당시 전라도 부안(扶安)에 우거(寓居)하고 있다가, 곧장 고향 안산(安山)으로 달려가서 재산을 털어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는데, 마침 반란이 평정되었으므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해 군자감(軍資監)정(正)에 임명되었다가, 선천부사(宣川府使)로 나갔다. 이때 가도(椵島: 피도)의 도독(都督)모문룡(毛文龍)과 교섭하여 그의 요구대로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그 결과 변방의 모든 업무가 원활하게 처리되었으므로, 인조는 대단히 기뻐하여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1625년(인조3)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관향사(管餉使)로 임명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모문룡이 후금의 후방을 공격하여 게릴라전을 펴자, 후금(後金)의 칸 홍타이지는 모문룡과 조선의 관계를 끊기 위하여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성준구를 관향사로서 찬획사(贊劃使)를 겸임하게 하여, 군량미의 공급과 군사 작전 계획을 돕게 하였다. 후금 군사가 평산(平山)까지 점령하자, 몽고와의 전쟁이 다급했던 후금의 칸 홍타이지는 조선에 화친(和親)을 청하고, 군사를 퇴각시켰다. 평안도 일대가 전쟁을 겪으면서 농사를 짓지 못하여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그는 가도의 모문룡과 교섭하여 수만 섬의 곡식을 꾸어서 수만 명의 평안도 기민(饑民)을 살려냈다. 평안도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그의 활동에 감동하여 청천강(淸川江) 가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인조가 그 업적을 가상하게 여겨서, 1629년(인조7) 특별히 정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시켰고, 1631년(인조9) 황해도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들어온 후에는 중추부 동지사 · 장예원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1632년(인조10)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는데, 1633년(인조11) 2월 9일에 한질(寒疾)에 걸려 관사(官舍)에서 객사하니, 향년이 60세였다

모문룡과 군량미 교섭

1624년(인조2) 그가 선천부사(宣川府使)로 나갔을 때, 후금이 요동(遼東)을 함락하자, 요동에 살던 한족(漢族) 유민(流民)들은 대거 배를 타고 평안도 선천(宣川) 앞 바다에 있는 가도(椵島: 피도)로 몰려왔다. 명나라 패잔병 모문룡(毛文龍)이 명나라 유민(流民)을 점거하고 스스로 도독(都督)이라 칭하며 조선에 군량미를 요구하였다. 그가 선천에 부임하여 가도의 모문룡(毛文龍)과 교섭하여 그의 요구대로 군량미를 공급하여 주었다. 그 결과 국경상의 업무가 모두 원활하게 처리되었으므로, 인조는 대단히 기뻐하여 그를 1625년(인조3) 양서(兩西) 지방의 관향사(管餉使)로 임명하였다. 의외로 군량미가 많이 소모되자, 인조는 “관향사성준구는 나라일은 생각하지 않고 눈앞에 닥친 치욕을 모면하려고 환상곡(還上穀) 중에서 조금 남은 군량미마저 중국인에게 몽땅 주어버렸다.” 하고, 그를 체직시키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평안도 지방이 대란(大亂)을 겪으며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자 성준구는 가도의 도독모문룡과 교섭하여 수만 섬의 곡식을 얻어내어 양서(兩西) 지방의 기민(饑民) 수만여 명을 살려냈고, 인조는 이를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성품과 일화

성준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체격이 훤칠하고 믿음직스러우며 도량이 넓고 커서,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남의 선한 것을 보면 반드시 칭찬해주고, 남의 곤궁함을 내 자신이 곤궁한 것 보다 더 위급하게 여겼다. 일찍이 그가 말하기를, “옛 사람 중에 현달한 이가 한 사람만 있으면 구족(九族)이 그에게 도움을 받게 되니, 사람들은 이 뜻을 몰라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녹봉(祿俸)을 반드시 가난하고 궁핍한 친척에게 나누어주었다. 인정이 두텁고 화목하여 종족(宗族)들이 항상 집안에 가득 찼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황해도 평산(平山) 금강(金剛)의 묘원(墓原)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친구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묘명(墓銘)이 남아 있다.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사헌부 장령(掌令)신요(申橈)의 딸인데, 자녀는 없다. 측실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성후룡(成後龍) · 성후기(成後夔)이다. 성후룡은 상국(相國)김상용(金尙容)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 성완(成琬) · 성경(成璟)을 낳았다. 인조 때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속잡록(續雜錄)』
  • 『동명집(東溟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정무록(丁戊錄)』
  • 『택당집(澤堂集)』
  • 『월연집(月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