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윤조(成允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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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9년(세조5)∼1509년(중종4) = 51세]. 조선 중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술이(述而)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아버지는 현령성가의(成可義)이고,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1492년(성종2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치렀다. 연산군 초기 관례대로 예문관 봉교(奉敎)에 임명되었다가, 1500년(연산군6)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1501년(연산군7)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 이때에 정치가 혼란하여 조사(朝士)들이 뇌물을 주고 하루아침에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나, 그는 분수를 지키고 뇌물을 주지 않아서 현달(顯達)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연산군 말기 여러 관직을 거쳐 종3품 승문원 참교(參校)에 이르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1507년(중종 2) 홍문관에 들어가서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승정원에 들어가서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509년(중종4)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고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한성부의 청사당(聽事堂)에 앉아서 일을 보다가 갑자기 풍증(風症)으로 어지러워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와 24일 만에 죽으니, 향년이 51세였다. 그 때가 1509년(중종4) 5월 25일이었다.

성품과 일화

성윤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순박하여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할 때 얼굴빛이 무표정하여, 비록 가까운 집안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평소에 손님을 대하듯이 조심하였다.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선(善)한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추진하였다. 다른 사람을 온화하고 조용하게 대하였으며 입으로는 절대로 남의 단점이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마음가짐이 확고하여 누구도 감히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중종실록』「졸기」에 그를 평하기를, “성윤조는 공정하고 청렴하여 여러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는데, 그가 일찍 죽자, 사람들이 아주 애석하게 여겼다.”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는데, 친구 이행(李荇)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의정부 좌찬성이손(李蓀)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용재집(容齋集)』
  • 『충재집(冲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