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양종(禪敎兩宗)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전기에 선종과 교종의 여러 종파들을 통합하여 운영한 공식 불교 종파.

개설

1424년(세종 6)에 세종은 불교의 여러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합하고, 선종과 교종에 각각 도회소(都會所)를 두어 승과(僧科)의 시행과 승려의 인사 등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는 이후 『경국대전』을 통해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르러 양종의 도회소가 서울 밖으로 이전되고 승과가 중단되었으며, 중종대에는 『경국대전』의 불교 관련 항목이 삭제되고 양종 체제가 혁파되었다. 그 뒤 명종대에 선교양종이 일시적으로 재건되고 도승법과 승과가 다시 시행되면서 불교계의 인적 계승이 가능해졌지만, 이후 19세기까지 국가에 의해 종파가 공인되거나 법적인 규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내용 및 변천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 억불 정책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면서 기존의 불교 종파가 7개로 통폐합되었다. 1406년(태종 6)에는 11개 종파 242개 사원의 사사전(寺社田)사사노비(寺社奴婢) 보유를 인정하여 그 수를 지정하고, 그 밖의 사찰에서는 수조(收租) 전지와 노비를 속공(屬公)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인 종파를 다시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총남종(摠南宗)·시흥종(始興宗)의 7개로 축소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말기의 오교양종(五敎兩宗)과 그 수 및 구성 면에서 비슷한 구조였다. 오교는 대체로 계율종(戒律宗)·법상종(法相宗, 자은종)·열반종(涅槃宗)·법성종(法性宗)·원융종(圓融宗, 화엄종)을, 양종은 조계종·천태종을 가리킨다.

세종대인 1424년에는 7개의 종파를 다시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였다. 즉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선종으로 합치고,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교종으로 통합하였다. 그와 더불어 승려의 인사와 교단 관리 등을 맡아보던 관청인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그 대신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를 각각 서울 흥천사(興天寺)흥덕사(興德寺)에 설치하였다. 그 결과 선종과 교종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만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았다.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총 3,750명이었으며, 사전(寺田)은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로 합계 7,900여 결의 소유가 인정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후 사림(士林)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성종대부터 억불 정책이 다시 강화되었다. 승려 자격증에 해당하는 도첩(度牒)이 없는 승려들을 환속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472년(성종 3)에는 도첩의 신규 발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한편 성종 초기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선교양종과 도승(度僧), 승과에 관한 규정이 법제화되는 등 불교에 대한 공인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는 양종의 도회소가 경기도 광주의 청계사(淸溪寺)로 이전되었고, 승과도 중단되었다. 또 그 시행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승려를 환속시키고 사원전(寺院田)을 혁파하라는 명까지 내려졌다.

이어 중종은 즉위 초기에 불교계를 회유하려 했지만, 기묘사림(己卯士林)이 공론을 주도함에 따라 폐불(廢佛)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507년(중종 2) 이후에 승과는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고 왕실 기신재(忌晨齋)가 혁파되었으며, 1512년(중종 7)에는 선교양종 및 양종의 도회소가 폐지되었다. 이어 1516년(중종 11)에는 『경국대전』의 불교 관련 조항이 삭제되어 불교는 법제적으로 폐지되는 상황을 맞았다.

그 뒤 명종대인 1550년(명종 5)에는 불교 신앙이 독실했던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무자격 승려가 급증함에 따라 생긴 폐해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선교양종이 다시 세워졌고,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던 도승법과 승과 제도가 다시 시행되었다(『명종실록』 5년 12월 15일). 선교양종이 재건되면서 보우(普雨)가 판선종사(判禪宗事)이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가 되었고, 수진(守眞)이 판교종사(判敎宗事)로서 교종의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또 왕실과 관련이 있는 내원당(內願堂)이 그전에는 99개였지만, 선교양종이 다시 세워진 뒤에는 주지나 지음(持音)이 파견된 사찰이 총 395개에 이르렀으며 경제적인 혜택도 입었다(『명종실록』 7년 1월 27일).

한편 승과가 재개되면서 이때 합격하여 판선종사와 판교종사를 겸임한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등 다수의 고승이 배출되어 이후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또한 수천명에 이르는 이들이 도승법을 통해 승려 자격을 얻어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양종의 존속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유생들은 폐지를 격렬하게 주장하였고, 결국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에 선교양종이 다시 혁파되었다(『명종실록』 21년 4월 20일). 일시적이었지만 선교양종의 복립은 이후 불교의 인적 계승을 가능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임진왜란의 의승군 활동을 거치면서 조선시대 후기에 불교가 존립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