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역(商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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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상인과 역관.

②상인의 성격을 띤 역관.

개설

상역(商譯)은 상인과 역관의 준말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상인의 성격을 지닌 역관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역관은 외국어의 상호 소통을 위한 통역관이지만, 조선후기의 역관은 그 본래의 역할과 함께 해외무역의 주체로서 등장하였다. 따라서 역사 용어로서의 상역은 무역상인과 무역상인의 성격을 지닌 역관을 각각 의미하거나 후자의 의미를 단독적으로 지칭하였다.

내용 및 변천

역관이 소속된 아문은 사역원이었다. 사역원에는 한학(漢學)·몽학(蒙學)·왜학(倭學)·청학(淸學) 등 4학을 갖추고 있었는데, 조선후기 사역원 소속 역관의 수는 총 600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의 관직 체계상 역관들이 담당할 실직(實職)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역관들 개개인에게 정직(正職)의 녹봉을 지급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역관들 직책에 대한 보상을 다른 데서 구해야 했는데, 중국으로 가는 사행을 수행하여 가는 임무가 가장 큰 특전이었다. 곧 임시직인 체아직(遞兒職)제도를 이용하여 사행이 있을 때마다 부연체아(赴燕遞兒) 역관을 선발한 것이었다. 부연체아에 뽑히는 것을 등제(等第)라고 하였는데, 역관들은 ‘일생 동안 학업에 힘쓰고 고생하여 이루려는 것은 오직 연경에 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만큼 부연 역관에 뽑히기를 희망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 이유는 역관이 사행의 과정에서 무역으로 거부(巨富)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부연 역관이 사행을 통하여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경제적 여건은 3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팔포정액의 사무역이 공인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팔포는 원래 인삼 80근을 여덟 꾸러미로 묶은 실물이었으나 점차 은화 2,000냥 정도의 공식적인 무역자금을 의미하는 가치 칭량의 단위로 변화하였다. 역관은 이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사무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

둘째는 관아무역 대행의 기회를 이용하여 사무역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즉, 중앙관아인 상의원·내의원은 왕실의 의복·각종 사치품·약재 구입을, 호조는 비단·모자·상아 등의 일반 수용품을,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 등은 군복과 깃발 장식을 위한 견직물과 병기 및 동전 주조의 원료들을 수입하였다. 이밖에 양향청(糧餉廳)과 종친부에서도 중국의 물품을 수입하였다. 이러한 중앙관아의 무역은 주로 역관이 대행하였다.

셋째는 공용은(公用銀) 부담을 명목으로 관은(官銀)을 빌려 무역에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공용은은 봉황성에서 북경에 이르는 동안 여러 관문을 지키는 관리와 사행을 호송하는 장경(章京)·통관(通官) 등에게 지급한 인정비, 청나라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정보 수집비, 사행 임무에 따르는 인정비 및 교제비에 들어가던 돈이었다. 매년 정기적으로 파견되는 사행을 두 차례만 잡아도 연간 은화 6,000냥, 동전 5,000냥은 꼭 필요하였다. 별사가 많을 때는 공용으로 드는 비용이 20,000냥에 이른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 공용은은 조선 정부의 예산에서 별도로 지급한 것이 아니라 역관의 팔포무역 자금에서 무상으로 징수해 왔다. 그 대신 조선 정부는 서울과 각 지방 아문으로부터 역관들에게 관은을 빌려주어 무역 자금으로 활용하게 하고,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으로 역관의 실리를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역관은 무역 자금의 융통에 크게 힘입을 수 있었다.

이렇게 대청무역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역관은 17세기 중반 이후 18세기까지 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의 중심에 서 있었다. 즉, 부연역관은 당시 왜관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동료 역관인 훈도(訓導)별차(別差)와 연결하여, 청으로부터 수입한 비단과 백사 및 국내산 인삼을 일본으로 넘겼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받은 왜은(倭銀)을 다시 대청무역으로 연결시켰다. 이때 왜관의 백사 수출 가격은 청에서의 수입 가격에 비하여 약 2.7배에 달하고 있어, 중개무역의 실제 이득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역관의 무역활동은 청·일간의 직교역으로 왜관무역이 점차 쇠퇴하고, 사상들의 책문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가 1758년(영조 34)에 실시한 관모제와 1797년(정조 21) 포삼제는 모두 역관들의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외교상 경비를 충당해 보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이후 그 주도권이 모두 사상들에게 넘어갔다. 1777년(정조 1) 세모제의 시행과 1810년(순조 10) 역관과 서울 상인 중심의 포삼계인을 혁파하고 그 역할을 의주상인에게 맡긴 조치는 대표적인 예이다. 1707년(숙종 33) 책문후시의 공인 이후 혁파와 공인을 반복하면서 결국 의주상인과 개성상인에게 책문교역을 맡기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의의

역관은 원래 상역(象譯)이라고도 하였으나, 조선후기 청과 일본을 잇는 중개무역을 통하여 거부를 축적하면서 상역(商譯)이라고도 불리었다. 특권적 지위를 이용한 역관의 무역활동은 사상들의 무역활동을 당해 내지 못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개항 이전까지도 역관의 특권적 지위와 그들과 연결된 특권상인의 이권을 보장해 주려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근대적 상업자본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참고문헌

  • 유승주·이철성,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이철성,『朝鮮後期 對淸貿易史 硏究』, 국학자료원, 2000.
  • 유승주, 「조선후기 대청무역의 전개과정-17·18세기 부연역관의 무역활동을 중심으로」, 『백산학보』 8, 1970.
  • 이철성,「18세기 후반 조선의 대청무역 실태와 사상층의 성장-모자무역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94,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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