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만호(上萬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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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순찰과 도둑 체포 등 치안을 맡았던 중앙 관직.

개설

조선왕조가 고려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순군만호부의 관직이었다. 이는 중앙에 있으면서 순찰과 도둑 체포, 치안 등을 담당했던 관서였는데, 왕조 교체의 불안한 시기라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최고 책임자인 도만호(都萬戶)의 바로 다음 직위였던 관계로 도만호를 보좌하고 유고 시 대행하는 것이 주된 직무였다.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태종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순군만호부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을 단행했다. 이를 계기로 사라졌다.

담당 직무

본디 고려후기에 원나라 군제를 수용하면서 설치된 관직이었는데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에도 그대로 계승된 것이다. 원나라에서 만호는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과 함께 관할하는 민가의 수를 표시하는 지휘관의 칭호였다. 그 뒤 만호부(萬戶府) 설립과 더불어 관직이 되면서 점차 무반이나 진장(鎭將)의 품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갈수록 세분되어 같은 만호라도 등급이 나누어졌다. 곧 상만호(上萬戶)·상부만호(上副萬戶)·중부만호(中副萬戶)·하부만호(下副萬戶)가 그것이다. 이로 인해 상만호아문(上萬戶衙門)에서는 부만호(副萬戶)를 두게 되었다(『세종실록』 25년 7월 3일).

고려에서 이러한 제도를 그대로 따라 중앙과 외방에 설치된 만호부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낡은 제도와 틀을 개편하면서 외방에 있던 만호부는 철폐되었고, 만호는 성격이 변하여 순수한 무관직이 되었다. 다만 중앙에서 순찰[巡綽], 도둑 체포[捕盜], 치안[禁亂] 등의 일을 맡아보았던 순군만호부는 일정 기간 그대로 유지하였다. 왕조가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순군만호부 관원으로는 도만호·상만호·만호·부만호·진무(鎭撫)·천호·제공(提控) 등이 있었으며, 휘하의 군인으로는 도부외(都府外) 약 1,000명, 나장(螺匠) 약 500명이 있었다. 상만호가 최고 책임자인 도만호를 보좌하고 유고 시 대행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 순군만호부를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로 고쳐 제조(提調) 1명, 판사(判事) 3명, 참상관 4명, 순위관(巡衛官) 6명, 평사관(評事官) 5명을 두었으나, 우왕 때 순군만호부로 환원되었다. 그 당시 친원(親元), 또는 친명(親明) 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이 커서 혼란에 강력히 대처하기 위해 도로 환원한 것 같다. 공양왕이 즉위한 뒤에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아 그대로 두었으며, 조선이 성립된 뒤에도 유지하였다. 아마 기존의 직무에다 업무가 좀 더 첨가되었을 것인데, 조선 개국에 불만을 품고 반대하는 세력을 적발해서 제압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변천

제1, 2차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태종은 무엇보다 민생 안정과 민심 수습에 주력해야 했다. 그런데 즉위 직후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들이 ‘형벌을 담당하는 관서인 형조가 있으므로 별도 기구를 두는 것은 중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그 휘하에 소속된 나장과 도부외의 수가 거의 1,500명이나 되는데, 모두 경기(京畿) 백성으로 충당하였다. 그로 인해 이들에게 역을 부과하지 못해 나머지 민호들이 전부 부담하게 되어 어려움이 극심하다고 했다. 또한 형조가 형벌을 맡고 있고, 순작은 부병(府兵)이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혁파를 건의했다(『태종실록』 1년 1월 14일). 이에 따라 1402년(태종 2)에 순위부로 바뀌었으며, 이를 계기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이상식, 「의금부고」, 『법사학연구』 4, 1977.
  • 한우근, 「여말선초 순군연구」, 『진단학보』 22, 196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