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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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청나라 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황제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시하는 인사법.

개설

삼궤구고(三跪九叩)라고도 한다. 궤(跪)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고(叩)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한다는 뜻이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한 단위로 3번 되풀이하였다. 고두(叩頭)의 예는 청나라 이전부터 있었으나, 청대에 들어와서 1궤 3고·2궤 6고·3궤 9고 등으로 제도화하고, 외국 사절에게도 강요하였다.

삼궤구고두는 청 태종이 병자호란의 화의(和議) 절차로 인조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다. 인조는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이마를 세 번씩 조아리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명백한 항복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었다.

내용 및 특징

1623년에 인조는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 정권을 몰아냈다. 서인계 공신(功臣)들은 광해군 정권의 명청 교체기에 구사한 등거리 외교 정책 대신에 금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사대 외교 관계를 계속하는 친명배금책(親明排金策)을 채택하여 후금, 후일의 청과의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인조 정권의 친명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 후금은 군사력을 동원해서 두 차례 조선을 침공해 왔다. 특히 청 태종은 1636년 12월에 대군을 동원해서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와 대신들을 포위 압박했다. 인조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45일간의 항쟁을 풀 수밖에 없었고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치욕적인 항복 의식에 참여했다.

1637년(인조 15) 1월 30일에 인조는 의장(儀仗)을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의 서문(西門)을 나섰다. 남한산성에서 나와 가시를 펴고 앉아 있다가[上下山, 班荊而坐], 청군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따라서 삼전도 항복 문서 조인식장으로 향했다. 그 뒤를 삼정승과 판서·승지 5명과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명만이 수행했다. 세자도 시강원·익위사 관원을 거느리고 왕의 뒤를 따라갔다.

식장에는 청 태종인 ‘칸([汗], [khan])’이 황옥(黃屋) 안에 자리를 잡았고 무장한 군사들이 방진(方陣), 즉 병사들을 사각형으로 배치한 진(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하고 있었다.

인조는 용골대의 인도로 단(壇) 아래에서 북쪽을 향해 자리를 잡았다. 집례자의 구령에 맞춰 인조는 청 태종을 향해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 즉 삼배구고두례를 거행했다. 예를 마치자 용골대가 인조를 동쪽 자리로 안내했다. 이때 강화도에서 잡힌 대군 일행이 단 아래 서쪽에 도열했다.

이어서 용골대가 왕에게 단 위로 오르라고 했다. 단 위의 자리 배치는 청 태종이 남쪽을 향해 앉았고 인조에게는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을 향해 앉도록 했다. 청나라 왕자 3명이 나란히 앉고 그 아래 소현세자가 서쪽을 향해 앉았다. 청나라 측은 활쏘기 시합과 음주, 청나라 초구(貂裘) 즉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의 착용을 요구했다. 이어서 빈궁과 대군 부인들이 청 태종에게 절을 하고 용골대는 명에서 조선 국왕에게 준 고명과 옥책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세자와 빈궁, 대군 부인을 인질로 남기고 인조는 도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인조는 청 태종의 무력에 굴복하여 그들의 요구대로 치욕적인 항복 의식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삼배구고두’는 유목 민족에게는 집권자에 대한 최상의 경의 표시로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의전 절차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동안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의 황제에게 조선의 국왕이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것은 조선의 군신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항복 의식으로 받아들여졌다.

변천

삼전도에서의 치욕적인 맹약 의식으로 인조 정권의 위신은 급격히 추락했다. 또한 병자호란에서 당한 국가적 굴욕과 민족적 치욕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 즉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