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릉(역)(山陵(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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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나 왕비의 능을 조성하는 데 따르는 공역.

개설

넓게 보면 산릉역(山陵役)은 세자 등의 묘소를 새로 조성하거나, 능·묘를 고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 따르는 공역까지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대동법이 시행된 17세기 이후에도 노동력 징발의 요역은 잔존했다. 대동법 이후의 요역은 공식적으로는 크게 2가지 분야에 한정되었다. 하나는 지방관청의 일상적인 관수 잡물들을 조달하는 일로써, 지방 재정 운영에 있어 일정 한도 내에서 잡역세 운영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산릉의 역사와 중국에서 오는 사신의 접대와 관련된 요역이었다.

산릉역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능묘의 조성은 수개월에 걸쳐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역사였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과 각종 잡물이 투입되어야 했다. 때문에 일찍부터 중요한 요역 종목으로 파악되었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대체로 8,000~9,000명의 역군을 한 달씩 징발하는 것이 관례였다. 연인원 270,000명가량이 필요하였고, 천릉역이라면 이보다 적은 연인원 210,000명 정도가 소요되었다. 각 지방에서 징발된 농민들이 산릉역의 주된 노동력이었다. 예컨대 1632년(인조 10)의 인목왕후(仁穆王后) 산릉역에서는, 전국의 요역농민 2,100명이 30일 동안 부역노동에 징발된 바 있었다.

산릉역은 대규모의 공역이었기 때문에 여러 유형의 부역노동이 함께 징발되었다. 전국의 승도를 징발해서 임시적인 부역군으로 편성한 승군과 군역 부담자로서 특히 고역에 시달리던 수군은 모두 이 시기 국가의 대규모 토목공사에 빈번히 동원되는 부역노동의 자원이었다. 인목왕후 산릉역에는 요역농민인 연군(烟軍)뿐 아니라, 1,000명의 승군과 700명의 수군도 함께 징발되었으며, 그 외에 연인원 37,000여 명의 모군이 별도로 고용되었다. 당시 부역노동의 가장 대표적인 담당자였던 연군·승군·수군은 각기 1개월 부역에 소모되는 식량을 스스로 장만하였으며, 역소에서 필요한 괭이·삽 등의 작업도구를 지참하는 경우도 많았다.

산릉역에서는 능소 부근의 경기 민호에 돌아가는 요역의 부담도 있었다. 회장(會葬)하는 인원에 대하여 그들이 들어가 있을 곳에 미리 가가(假家)를 짓고, 때로는 방을 만들어 구들까지 놓게 되는데, 이 같은 공역이 산릉역에 따르는 특수한 요역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 각 고을에서 나누어 맡은 이들에 대한 접대 역시 경기 주민의 부담이었다. 예장(禮葬) 발인 때 상여를 끄는 여사군(轝士軍)을 비롯한 각종 차비군(差備軍) 약 5,000여 명을 동원하는 일은 매번 국상 때마다 한성부에서 담당하던 분야였다.

대규모의 요역 징발은 막강한 국가권력의 능력으로도 점차 버거운 일이 되고 있었다. 대체로 원거리를 이동해서 응역하게 되는 부역군의 요역 부담이 지나치게 무겁고 비효율적이라는 것, 농번기에는 연군을 징발하기 어렵다는 것, 강제 징발된 부역군의 작업 능률이 크게 떨어질 뿐 아니라, 때로는 공역의 합리적인 진행을 방해하기에 이른다는 것 등이 원인이었다. 부역군은 피역·도망·대립의 방도를 써 가며 요역 징발에 저항하였다. 관의 입장에서도 구태여 저항과 비효율이 따르는 낡은 역역(力役) 체계에 의존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더구나 유민으로 전락하여 도회지로 유입하는 몰락 농민들을 고용한다면 진휼에도 보탬이 되는 또 다른 이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17세기 초엽의 토목공사에서 요역 징발을 대신하여 고용 잡역부인 모군을 고용하는 새로운 노동력 수급 체계를 점차 도입·정착시켜 갔다. 17세기 초엽부터 산릉역에 모립제가 적용되기 시작하였고, 그 비중은 점차 확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산릉을 정하고 조성하는 일은 국가의 막중한 대사로 여겨졌다. 따라서 대동법이 시행된 후 많은 요역 종목이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분야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나, 산릉역의 분야는 상당 기간 요역의 역종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영조대의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산릉 및 조사(詔使) 외의 일체 요역으로써 다시 민을 번거롭게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첨가되었다. 산릉역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역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요역 분야로서 특수하게 관리될 필요성이 있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내용

왕이나 왕비가 사망한 지 5개월 만에 장례를 치러야 했으므로, 산릉의 영조공사는 이 기간 내에 모든 공정을 마쳐야만 하였다. 산릉도감을 설치하고 상지관(相地官)을 파견하여 능역(陵役)을 택정하면, 소요되는 인력을 헤아려서 분정·징발하거나 혹은 모립·고용하였으며, 이때부터 비로소 역사는 시작될 수 있었다.

산릉의 조성을 주관하는 산릉도감은 임시로 설치된 관서였다. 여기에는 삼물소(三物所)·조성소(造成所)·노야소(爐冶所)·대부석소(大浮石所)·보토소(補土所)·소부석소(小浮石所)·별공작(別工作)·분장흥고(分長興庫)·번와소(燔瓦所)·수석소(輸石所) 등의 작업장이 마련되었다. 삼물소는 석회와 가는 모래 및 황토를 준비해서 현궁(玄宮)의 묘실을 조성할 때 광중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이 3가지를 섞어 벽에 바르는 일을 맡았다. 조성소는 정자각과 찬궁을 지었으며, 대부석소는 문무석 등 큰 석물을 제작하였고, 노야소는 철물 등의 제작을 담당하였고, 보토소는 산릉 주변의 필요한 곳에 흙을 채워 메우는 일을 맡았고, 수석소는 석물의 운반을 담당하였다.

특별히 노동력이 많이 요구되는 공정은 돌을 깨는 부석(浮石)과 운반하는 수석(輸石) 등의 석역(石役)과 보토 및 사초(莎草) 작업, 그리고 능의 부속건물을 건축하는 작업 및 석실을 조성하는 작업 등이었다. 석역은 혼유석(魂遊石)·비석·석인·석수 등 석물의 제작을 위한 것이었는데, 먼저 돌을 떼어 내는 부석의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여기에는 석수들이 동원되었지만, 이들을 보조하기 위해서, 또 채석에 앞서 실시되는 굴토의 작업 등에 더 많은 수의 인부가 필요하였다.

산릉역에서 가장 많은 인부가 동원되는 분야는 대체로 돌 나르는 일이었다. 큰 돌덩이를 능소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부석소가 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다음에 능역의 보토 작업과 능 위에 덮을 사초를 떼는 작업, 그리고 부속건물인 정자각·재실·비각 등을 건축하는 데에도 많은 인부가 투입되었다. 그 밖에도 산릉역의 필수적인 공정이었던 석실의 조성과 이곳의 수분 침투를 막기 위하여 사용되는 삼물의 조성, 이어서 능역의 청소 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부의 동원이 필요하였다.

17세기 초엽 징발역군에 의한 산릉역에서는, 연군·승군·군인이 대거 징발되었다. 이 같은 역군 징발 체계는 17세기 초엽 이래 단계적으로 모립제로 전환되어 갔다. 산릉역의 각종 잡역은 점차 모군의 노동력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모군들은 삼물소·조성소·대부석소·소부석소·수석소·보토소·노야소·분장흥고·번와소 등 능소의 여러 작업장에 분산 배치되어서 각종 잡역을 담당하였다.

17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모군과 함께 징발역군인 연군·승군·수군 등이 사역되었는데, 대체로 수석소·보토소·대부석소·조성소의 순으로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채석·운석·보토·건물 조성 등의 작업에 많은 인원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보토소·조성소·삼물소 등의 작업장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동력을 쓰고 있었다. 특히 석물의 규격이 작아졌을 뿐 아니라, 수레 등 운반시설이 많이 활용되어 돌을 싣고 나르는 일에 필요한 노동력이 크게 절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초엽의 산릉역에서는 17세기 초엽, 아직도 부역노동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던 시절의 토목공사에 비해서 투입된 노동력 전체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음을 볼 수 있다. 그 기간에 산릉역에서 필요한 노동력의 크기는 절반 내지 3분지 1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변천

17세기 이후 산릉역에서 모군을 고용하게 되면서 막대한 양의 고가(雇價), 곧 품삯을 지불하는 데 드는 대규모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다. 각 도의 연군을 징발하는 대신 연군가포(烟軍價布)를 거두게 함으로써 모군을 고립하는 재원으로 삼거나, 부조(扶助)라는 명목으로 각 도의 감영·병영·수영에 면포를 나누어 청구하기도 하고, 혹은 사복시·상평청·병조·공조 등 중앙 각사에 비축되어 있는 면포를 호조로 이송하여 산릉역을 중심으로 한 국상의 모든 비용에 쓰게 하였다.

17세기 초엽 산릉역의 노동력 징발 체계는 연군·수군·승군의 부역노동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의 선조 목릉(穆陵) 산릉역에서 자원 역군에 한해 면포를 거둔 것을 시발로 하여 1630년(인조 8) 선조목릉 천릉역에서 하삼도 및 강원도 연군 3,000명에게서 가포를 거두게 되면서, 이후 산릉역의 노동력 수급체계에서 모립제가 적용되는 비중은 점차 늘어났다. 연군의 산릉역 징발은 1645년(인조 23)의 소현세자 묘소역을 마지막으로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수군 등 군병이 동원되는 마지막 사례는 1673년(현종 14)의 효종 영릉(寧陵) 천릉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승군(僧軍)도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貞聖王后) 산릉역에 징발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징발되지 않았다. 산릉역에서의 노동력 수급 체계는 이같이 부역노동에서 모립제로 점차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18세기 중엽 이후의 산릉역이 17세기 초엽의 산릉역과 비교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건물 조성이나 능역 보토 등의 작업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인부를 써서 공사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력 조달 체계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 변동의 원인으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모립제의 방식으로 고용된 모군은 징발역군 사역의 비효율성을 점차 극복해 나아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부역 기간이 끝나서 빨리 귀환하기를 바라던 종전의 징발역군과는 달리, 품삯을 받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일터를 찾아 돌아다니던 직업적인 공사장 인부였다. 둘째, 징발역군의 부역노동에서 모립제의 고용노동으로 전환되면서 많은 인건비의 재원이 필요한 경비상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의 각종 역사에서 최소한의 인부만을 고용하는 방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공비의 절약을 위한 노동력의 절감이 요청되었다. 각종 장비의 개선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그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의의

조선시기의 산릉역은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는 대표적 토목공사 가운데 하나였다. 일찍부터 노동력 징발의 부역노동이 적용되었는데, 특히 농민의 요역노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군인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도 노동력을 보충하는 방편이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부역승군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는 추세를 보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모군을 고용하는 모립제가 적용됨으로써 부역노동으로부터 고용노동으로 노동력 조달 체계가 변동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부역노동의 해체와 물납세화,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과 임노동의 발전상을 보여 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강만길,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 윤용출, 「17세기 초의 結布制」, 『釜大史學』 19, 1995.
  • 윤용출,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징발」, 『역사와 경계』 73,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