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조(副提調)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비변사(備邊司)·승문원(承文院) 등에 소속된 정3품 당상관의 겸임 관직.

개설

부제주, 부좨주라고도 한다. 부제조(副提調)를 포함한 제조 직제는 중국 송·원나라 때 등장한 것으로, 우리는 고려말 원 간섭기에 도입되었다. 제조 직제는 고려말, 조선 초를 거치며 도제조·제조·부제조 등으로 분화되었다. 부제조는 1406년(태종 6) 전(前) 전서(典書)이사영(李士穎)과 김광보(金光寶)를 별와요부제조(別瓦窯副提調)로 삼은 것이 처음 등장하는 사례이다. 이후 비변사를 비롯해 상복색(喪服色)과 승문원·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사역원·전옥서(典獄署)·와서(瓦署)·사섬서·관습도감(慣習都鑑)·원각사조성도감(圓覺寺造成都監) 등에 설치되었다.

1423년(세종 5) 2월 각 관서의 부제조를 포함한 제조의 인원 가감이 있었다. 다음 달인 3월에 다시 한 번 정원에 대한 조정이 이루어져, 인수부(人壽府)·인순부(仁順府)를 포함해 승문원 등 모두 16개 관서에 20명의 부제조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후 『경국대전』 단계에 오면 대폭 축소된다. 승문원은 정원이 없으며, 사옹원은 정원이 5명이었고, 내의원·상의원·전옥서는 각각 1명씩의 부제조만 두었다. 내의원과 상의원 부제조는 승지 중에서 겸직하였고, 사옹원 부제조 5명 가운데 1명 역시 승지가 겸하였다. 임시 아문에도 부제조가 설치되었는데, 진연도감(進宴都監)에 6명의 부제조를 두었고, 산실청이 설치되면 도제조·제조 등과 함께 부제조가 설치되었다.

담당 직무

도제조나 제조가 설치된 관서에서 부제조는 이들과 협의를 통해 관서의 업무를 주관하였다. 예를 들어 승문원 부제조의 경우 중국에 보내는 자문(咨文)이나 주문(奏文)을 관장하거나(『인조실록』 13년 7월 25일), 승문원과 관련된 자료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10년 8월 3일). 사옹원 부제조는 왕의 어찬(御饌)을 감독하였다. 내의원 부제조는 도제조·제조 등과 함께 왕을 직접 만나[引見] 건강 상태를 점검하였으며, 왕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면 궁궐에서 숙직[直宿]하기도 하였다.

변천

부제조의 직제는 시대가 변하면서 각 관서의 필요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였다. 연산군대 내수사와 연방원(聯芳院)에 부제조를 두었던 적이 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폐지되었고, 중종대 장악원에 부제조를 신설하였다가 역시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 광해군대에는 선수도감(繕修都監) 부제조나 흠경각(欽敬閣) 교정청(校正廳) 부제조 등이 일시적으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에는 처음으로 비변사에 부제조를 두고 병무(兵務)에 익숙한 자를 뽑았다. 정원은 1명인데, 중국 송나라 때나 고려 때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궁중을 지키던 첨서추밀(簽書樞密)의 직임에 비견되면서 그 선임을 중요하게 여겼다(『영조실록』즉위년 12월 1일). 그리하여 만약 결원이 생기면 대신(大臣)이 상의하여 다른 사람으로 뽑았다(『영조실록』 12년 6월 5일). 그리고 이를 역임하면 그대로 품계가 올라가게[陞品] 되는 관직이었다.

이 밖에도 이전에는 교서관이었던 규장각 외각(外閣)에 부제조 2명을 두고, 1명은 규장각 직제학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고종대 관제 개정 과정에서도 부제학 직제는 변하였다. 1865년(고종 2) 비변사가 의정부와 합해져 공사색(公事色)으로 개편되면서 부제조는 혁파되었다. 1895년 설치한 봉상사에는 다음 해 부제조 10명을 설치하였고, 사옹원이었다가 1895년 개칭한 전선사(典膳司)에는 1900년에 부제조 1명을 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연향(宴享)이나 가례(嘉禮)가 있을 때만 뽑도록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전조례(六典條例)』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송희, 『조선초기 당상관 겸직제 연구: 동반 경관직 임시직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출판부,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