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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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 관아나 군대에서 심부름하던 종 또는 궁중 상궁(尙宮)들의 살림집에서 붙박이로 일하던 가정부.

개설

조선시대 지방 관아나 군대에서 심부름하던 종을 지칭한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방자(房子)는 궁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인데, 각사(各司)의 비자(婢子) 중에서 뽑았다고 설명되어 있다. 혹은 심부름꾼 등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울러 『세종실록』에는 과거에 사사(寺社)의 노비를 혁파하여 양종(兩宗)에만 적당히 주고, 남종[奴]을 ‘방자’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세종실록』 30년 12월 9일). 궁중의 방자는 비자(婢子)·각심이·방아이 등의 별칭이 있었다.

담당 직무

주로 관서나 지방 관아, 군대에서 여러 가지 심부름을 담당했다. 궁궐에 배치되었던 방자는 각종 심부름 및 대비전 등의 입번(入番)을 서기도 했다. 궁중방자 중에는 특히 ‘글월비자’가 있어 색장나인(色掌內人) 밑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문안편지를 돌리는 바깥 근무를 담당했다. 아울러 왕실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 의례에 따라 배치되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궁궐에서 근무했던 방자는 단순한 심부름꾼으로만 인식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변천

『세종실록』에 따르면 방자는 궁중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인데, 각사의 비자 중에서 뽑았다고 설명되어 있다. 혹은 심부름꾼 등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울러 『세종실록』에는 과거에 사사(寺社)의 노비를 혁파하여 양종(兩宗)에만 적당히 주고, 남종을 ‘방자’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세종대의 기록을 통해 경우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모두 ‘방자’로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 이상의 변천 과정을 찾기 어렵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참전했던 명군(明軍)의 활동을 돕기 위해 여러 명의 통역관과 방자들을 이들에게 배치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들은 명군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면서 이들의 동정을 조선 조정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전쟁 시기의 특별한 사례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후기에 나타난 소설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는 노총각으로 재치가 있어 상전인 이몽룡을 놀리면서도 춘향과의 관계 진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민중들의 방자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궁중의 방자는 대개 나인(內人)으로도 뽑히지 못하는 가난한 천민의 딸들이었다. 원래 처녀만을 선발했고, 머리를 땋아 늘였으며, 짙은 남빛의 반물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이후로는 기혼녀가 많아지게 되었다. 당시 이들의 복색은 보통 쪽을 지고 아무 옷이나 수수하게 입는 것이었다. 한편, 지방관서의 방자는 무릎 높이로 짧은 무명 창의(氅衣)를 입고 미투리를 신었다. 그 위로 무릎까지 닿는 통행전을 입었다.

참고문헌

  • 金用淑, 『朝鮮朝宮中風俗硏究』, 일지사, 1987.
  • 金興圭, 「房子와 말뚝이 : 두 典型의 比較」, 『한국학론집』5,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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