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氅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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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옆이나 뒤에 트임이 있는 옷.

개설

옷의 옆이나 뒤에 트임이 있는 옷으로 무의 유무와 소매의 넓이, 형태 등에 따라 대창의(大氅衣), 소창의(小氅衣), 중치막(中致莫), 학창의(鶴氅衣) 등으로 나뉜다. 또는 흔히 대창의를 창의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창의는 대창의를 가리키며, 큰 창옷이라고도 한다. 옷의 형태는 소매가 넓으며 커다란 삼각형 무가 달려 있고, 뒤 중심선이 트여 있으며, 간혹 옆선에 트임이 있는 경우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대부의 외출복 혹은 평상시 겉옷으로 입었으며, 백관의 조복과 제복, 단령의 받침옷 그리고 도포의 받침옷으로 입었다. 용도에 따라 정자관이나 방건·탕건·흑립 등의 관모를 썼으며, 허리에는 홍색이나 청색의 광다회나 세조대를 매고 운혜나 태사혜를 신었다. 1884년(고종 21) 갑신의제개혁 때 다른 소매 넓은 옷과 함께 착용이 금지되었다(『고종실록』 21년 윤5월 25일).

소창의는 창옷 또는 소창옷이라고도 한다. 좁은 소매의 긴 저고리[夾袖長襦]도 속칭 소창의라고도 하였다. 옷의 모양은 중치막과 같으나 소매가 좁으며, 무가 없고 양옆이 겨드랑이까지 트여 있다. 저고리 위에 입거나 저고리 대신 입는 일상복으로 주로 겹옷이나 솜옷, 누비옷으로 만들었다. 풍속화에 보면 주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입었고, 가마꾼도 많이 입었는데, 활동하기 편하게 뒷자락을 앞으로 가져와 허리끈처럼 맨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창의나 도포의 밑받침 옷으로도 사용되었고, 평상시 바지저고리 위에 입고 세조대(細絛帶)를 띠기도 하였다. 이 옷은 하급관리들이 입는 옷이어서 조선말기, 개화기 이후에 ‘창옷짜리’라고 하면 하급관리를 낮추어서 부르는 말이었다.

중치막은 임진왜란 이후에 많이 입었던 옷으로, 깃은 곧으며 소매는 넓고 무는 없으며 옆트임이 있다. 이 옷은 사대부가에서는 관복의 밑받침 옷으로, 일반인들은 외출복으로 입었다. 풍속화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조선말기 유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청색 명주로 된 중치막이 있는데, 흥선대원군의 금관조복의 받침옷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학창의는 옛날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고 하여 사대부의 연거복으로 입었고, 덕망 높은 도사나 학자가 입었다. 문헌에는 사신의 편복으로 입은 사례가 많다. 학창의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2가지로 나타나는데, 17~18세기에는 깃 모양이 맞깃이며, 와룡관(臥龍冠)·학창의·백우선(白羽扇)을 착용하여 제갈량(諸葛亮)의 차림새와 동일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19세기경 초상화와 현전하는 유물에서 살펴본 학창의의 형태는 대창의와 같으나 백색 혹은 청색 옷에 깃·수구·도련·뒤트임·옆트임 등에 검정색 선이 대어져 있다. 이와 유사한 옷으로는 심의(深衣)와 난삼(襴衫)이 있으며, 유사한 검은색 선으로 인하여 종종 심의를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학창의는 공복의 속옷·사대부의 연거복(燕居服)·습의(襲衣)·사신복(使臣服) 등으로 사용되었다. 외교사절복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일본으로 간 통신사(通信使)는 학창의, 정자관, 와룡관을 착용했다.

청색 학창의[靑鶴氅衣]는 세조의 대상(大祥) 후부터 예종의 소상(小祥) 전까지 흑의(黑衣)·흑두건(黑頭巾)과 함께 상복으로 입었다[『성종실록』 1년 8월 17일 3번째기사].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이은주·조효숙·하명은, 『17세기의 무관옷 이야기』, 민속원, 2006.
  • 박선희·홍나영, 「학창의 연구」, 『복식』61권 2호 , 2011.
  • 이민주, 「옥소 권섭의 학창의에 관한 연구: 옥소고 소재 학창의 관계 자료를 대상으로」, 『복식문화연구』13(2), 2005.
  • 이해영·김문자, 「우리나라 포의 유형 및 원류에 관한 연구」, 『복식』15, 1990.
  • 홍나영, 「출토복식을 통해서 본 조선시대 남자 편복포의 시대 구분」, 『복식』58권 5호 , 한국복식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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