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內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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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에서 상궁(尙宮) 등 여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왕과 왕실 식구들을 모시고 시중들던 궁녀.

개설

나인[內人]의 올바른 발음은 ‘내인(內人)’이나 내인의 음(音)이 변하여 ‘나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궁궐에서 왕·왕비·왕세자·왕세자빈 등 왕실 식구들을 모시면서 시중을 들고 이들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궁녀이다. 궁녀를 궁관이라 하고, 이를 통칭하여 여관(女官)이라 하였다. 궁녀의 조직은 상궁, 나인, 견습 나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나인은 항아(姮娥)님이라고 불렸으며, 견습 나인으로 입궁한 후 18~19세 정도에 관례(冠禮)를 치르면 나인이 되었다.

담당 직무

나인의 담당 직무는 내명부의 궁관들이 담당하던 일이다. 왕실 식구들을 인도하고 의식(儀式)을 준비하며 의식에 참여하여 의식을 진행하였다. 궁궐에서 사용하는 의복, 장신구 등을 만들고 공급하였으며, 음식을 만들어 왕실 구성원들의 평소 식사를 준비하였고, 의례가 진행될 때에는 이를 내놓았다. 이외에도 궁녀들의 풍속을 감찰하는 일도 궁관의 직무였다. 나인 중 ‘색장나인[色掌內人]’이라고 하여 궁궐 내에서 궐 밖의 종친이나 외척의 집에 보내는 편지를 관장하거나, 연초에 문안 단자를 거둬들이는 직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본궁나인[本宮內人]’은 왕비나 왕세자빈이 혼례를 치르고 입궁할 때 본가에서 들여보내 시중을 들게 하기도 하였다.

나인은 왕과 대신들이 참석하였던 규모가 작은 조회인 상참(常參) 후에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년 8월 18일). 또한 왕비가 승하하였을 때 소렴(小殮)에 참여하여 시신을 소렴상에 옮기는 직무를 담당하였다. 빈전에서 생전과 같이 예를 다하여 모셨고, 대행왕비에게 내려진 축문과 시책보(諡冊寶)·애책(哀冊)을 글을 아는 나인이 선독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8년 3월 25일), (『세종실록』 28년 3월 27일), (『세종실록』 28년 4월 16일).

변천

나인은 어린 시절 입궁하였기 때문에 ‘생각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는 머리를 생머리로 빗었기 때문에 나온 말로써 소녀 나인을 지칭하였다. 이들은 관례(冠禮)를 치르면 비로소 나인이 되는데, 이때 관례는 신랑 없이 결혼식을 겸하는 의식이었다. 관례에서 왕은 나인으로 승격시키는 첩지와 옷감을 내려 주었다.

나인은 궁관직 최고의 상궁까지 승진하고 평생을 궁궐 내에서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병이 생기면 궁궐 밖으로 옮겼는데, 이때의 처소를 ‘질병가(疾病家)’라고 한다. 나인은 관례를 치르며 이미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평생 혼인을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가뭄이 지속되는 경우 음(陰)의 기운이 강하여 재앙이 지속된다는 유교적 재이관(災異觀)에 의해 나인들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 살도록 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4년 6월 8일). 근본 대책으로 나인들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 시집갈 수 있도록 하여 답답한 기운을 풀어주자는 건의도 있었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현종실록』 3년 4월 2일).

나인들은 때로는 사치를 하여 본가에 갈 때 수행한 자들에게 옷감 등을 선물로 주었는데, 이에 대한 엄한 감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연산군일기』 11년 10월 22일). 여기에 더하여 나인이 차던 금은주옥(金銀珠玉)의 물품을 훼파(毁破)하는 조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년 3월 27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김용숙,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 일지사, 1987.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