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도(朴弘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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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6년(선조 9)~1623년(광해군 15) = 48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자수(子修)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기시(軍器寺)정(正)박문영(朴文榮)이고, 어머니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유륜(兪綸)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박윤한(朴允韓)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수위(朴守緯)이다. 첫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허성(許筬)의 딸이고, 둘째 부인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조인후(趙仁後)의 딸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른 후, 참수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 2) 11월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2년 11월 3일] 1611년(광해군 3) 9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1612년(광해군 4) 2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을 거쳐, 그 해 9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3년 9월 ?일, 광해군 4년 2월 12일, 광해군 4년 9월 22일] 1613년(광해군 5) 1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이 때 박홍도(朴弘道)는 조유도(趙有道) · 조존도(趙存道) 등과 함께 이이첨(李爾瞻)과 어울려 다녔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이이첨을 ‘겸삼도순찰사(兼三道巡察使)’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1월 6일]

박홍도는 그 해 2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이후 세자시강원 사서와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文學), 사간원 헌납(獻納), 홍문관(弘文館)부교리(副校理), 홍문관 수찬修撰), 이조 좌랑(佐郞), 홍문관 교리(校理),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2월 25일, 광해군 5년 12월 13일, 광해군 6년 2월 18일, 광해군 6년 10월 19일, 광해군 6년 11월 3일, 광해군 7년 2월 28일, 광해군 7년 6월 8일, 광해군 7년 7월 19일] 그는 이조 전랑으로 있을 당시 전형의 권한을 독점하여 음관과 무반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12월 8일] 이어 그는 1616년(광해군 8) 2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617년(광해군 9)에는 구천군(龜川君)과 금산군(錦山君) 등 19인이 이이첨 무리의 횡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광해군일기』광해군 8년 2월 24일, 광해군 9년 1월 4일] 이때 박홍도는 구천군 및 금산군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였다며 삼사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광해군일기』광해군 9년 1월 6일, 광해군 9년 1월 7일]

1621년(광해군 13) 7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고, 얼마 후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으며, 1622년(광해군 14) 4월에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3년 7월 2일, 광해군 13년 12월 11일, 광해군 14년 4월 4일] 그러나 승정원 좌부승지로 재직 중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이첨의 무리들과 연루된 혐의로 1623년(인조 1) 3월 13일 참형에 처해졌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년 3월 13일] 이 때 나이는 48세였다. 한편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홍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험하고 잦달아서 자리를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근심하고, 얻은 뒤에는 또 잃을까 걱정하였는 등 도무지 염치가 없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12월 8일]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