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정(朴弼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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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85년(숙종 11)~? = ?]. 조선 후기 숙종(肅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지냈다. 자는 계심(季心)이고, 호는 일휴(逸休)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거주지는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박세증(朴世拯)이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이여절(李汝晢)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박정린(朴廷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안건(朴安建)이다. 송시열(宋時烈)과 친척 간이다.

숙종~경종 시대 활동

1711년(숙종 37)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718년(숙종 44)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44년 윤8월 5일] 1719년(숙종 45) 1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고, 그 해 11월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12월에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45년 1월 11일, 숙종 45년 11월 13일, 숙종 45년 12월 7일]

1720년(경종 즉위년) 7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송시열을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추후하여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였다.[『경종실록(景宗實錄)』 경족 즉위년 7월 7일, 경종 즉위년 8월 16일] 1721년(경종 1) 1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나, 이듬해인 1722년(경종 2)에는 사과(司果)로 있었다.[『경종실록』경종 1년 1월 20일, 경종 2년 1월 15일] 그러나 노론(老論)을 축출하고, 소론(少論) 정권을 수립한 이후 노론 탄압의 앞장을 섰던 소론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의 척소를 받았다.[『경종실록』경종 2년 1월 26일]

영조 시대 활동

1725년(영조 1) 8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1729년(영조 5) 9월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년 8월 10일, 영조 5년 9월 26일] 1734년(영조 10) 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1737년(영조 13) 9월에는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으며, 1739년(영조 15)에는 북청부사(北靑府使)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0년 9월 1일, 영조 15년 5월 30일] 이어 1741년(영조 17) 11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7년 11월 8일]

1751년(영조 27) 사직(司直)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영성군(靈城君)박문수(朴文秀)와 그 여러 일족들을 인솔하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와 관련하여 상서(上書)하였다. 박혁거세를 모신 사당인 숭덕전(崇德殿)의 위판(位版)에 ‘신라시조(新羅始祖)’라고만 쓰여 있고 왕자(王字)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판 및 비(碑)에 ‘신라시조왕(新羅始祖王)’이라 쓰고 비문도 숭인전(崇仁殿) · 숭의전(崇義殿)의 준례에 따라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할 것을 청원하였다.[『영조실록』영조 27년 7월 22일] 이후 1752년(영조 28) 승정원 승지를 거쳐, 1755년(영조 31) 1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영조실록』영조 28년 8월 10일, 영조 31년 1월 20일]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