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륭(朴致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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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92년(숙종 18)~1766년(영조 42) = 75세]. 조선 후기 영조(英祖)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 등을 지냈고,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증직되었다. 자는 여승(汝升)이고, 호는 유곡(楡谷)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박태흥(朴泰興)이고, 어머니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홍만겸(洪萬兼)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박두익(朴斗益)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일개(朴一開)이다. 첫째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홍육(洪忄育)의 딸이고, 둘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승교(尹承敎)의 딸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26년(영조 2)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35세였다.[『방목(榜目)』] 1740년(영조 16)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1744년(영조 20)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6년 9월 18일, 영조 20년 9월 2일] 이 때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문제가 되어 갑산부(甲山府)로 유배되었는데, 1746년(영조 22) 유배지에서 풀려났다.[『영조실록』영조 20년 9월 7일, 영조 20년 9월 16일, 영조 20년 9월 24일, 영조 20년 10월 11일, 영조 21년 12월 21일, 영조 22년 1월 6일] 1748년(영조 24)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 겸 교양관(敎養官)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그는 사재를 털어 폐지된 지 오래된 시사교양(試士敎養)의 제도를 다시 세워 문풍(文風)을 일으켰다. 1750년(영조 26)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751년(영조 27)에 장연부사(長淵府使)로 나가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의 진휼에 진력하였다.[『영조실록』영조 26년 3월 11일] 그 후, 사간원 헌납(獻納)과 사헌부 장령의 관직을 번갈아 역임하였다.[『영조실록』영조 29년 4월 2일, 영조 31년 9월 8일]

1759년(영조 35) 그가 사간원 헌납으로 재임할 당시, 그의 간언이 대간(臺諫)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하여 파직 당하였으나, 곧 복직 되었다.[『영조실록』영조 35년 3월 21일] 1762년(영조 38) 사헌부 집의(執義)로 재임할 당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구명을 위하여 상소하였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영조실록』영조 38년 8월 9일, 영조 38년 8월 10일] 그러다가 1766년(영조 42)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이다. 이듬해인 1767년(영조 43) 3월 특사되었다.[『영조실록』영조 43년 3월 14일]

사람됨이 강직하고 깨끗하며 굳세었던 그는 1796년(정조 20)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20년 4월 18일] 한편 청백리에 녹선되기 이전, 정조(正祖)가 왕위에 오른 후 얼마 되지 않은 1777년(정조 1)에 그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추증(追贈)되었고, 1801년(순조 1)에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가증(加贈)되었다.[『정조실록』정조 1년 1월 19일, 『순조실록(純祖實錄)』순조 1년 2월 30일]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본암집(本庵集)』
  • 『유심재집(有心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