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처륜(朴處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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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5년(세종 27)~1502년(연산군 8) = 58세]. 조선 전기 세조·예종·성종·연산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이다. 자는 거경(巨卿)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박사란(朴思欄)이며, 어머니 부평유씨(富平柳氏)는 군사(郡事)유한(柳閑)의 딸이다.

세조 · 예종 · 성종 · 연산군 시대 활동

1464년(세조 10) 약관(弱冠)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바로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1470년(성종 1) 겨울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고, 이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어 경연(經筵)전경(典經), 홍문관 정자(正字)를 겸하면서 기사관(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다. 그 뒤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 승문원(承文院) 교검(校檢)을 역임하였다. 1476년(성종 7) 1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佐郞), 형조 좌랑, 사헌부 지평(持平), 예조 정랑(正郞), 사헌부 장령(掌令), 홍문관 응교(應敎), 전한(典翰) 등을 지냈다.

1489년(성종 20)에 성종이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장차 중용할 목적으로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때 선정으로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며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을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켜 남양 고을에 많은 선비가 배출되도록 하는 등 치적을 올렸다. 과만(瓜滿) 후에 봉상시(奉常寺)부정(副正)이 되었다가 1494년(성종 25) 2월에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남양의 백성들이 그가 남양부사 때의 치적을 들어 진정을 올렸으므로 첨중추부(中樞府) 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 이 해 10월에 관압사(管押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1495년(연산군 1) 3월에 돌아와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곧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그 뒤 지제교(知製敎)로 전직되었다. 1497년(연산군 3) 1월에 형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선정으로 그 이름이 높았는데, 다음 해에 신병으로 조정으로 돌아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었다. 1502년(연산군 8) 7월에 향년 58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처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수려하고 특이하여 이미 7, 8세 때 『소학(小學)』을 읽었다. 타고난 성품이 침착하고 묵중하였다. 집에 있을 때 근엄하였고 가업을 경영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고 아우들을 보살필 때는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독실하였다. 사람을 접할 때나 벗들을 대할 때 한결 같이 성신(誠信)하고 간이(簡易)하게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부평(富平) 선친 묘소의 밑에 있다. 김안국(金安國)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부인 수원최씨(水原崔氏)는 최치빈(崔致濱)의 딸인데,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세언(朴世彦)이고, 2자는 박세호(朴世毫)이며, 1녀는 조원충(趙元忠)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부록
  • 『예종실록(睿宗實錄)』부록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