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인(朴齊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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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18년(순조 18)~1884년(고종 21) = 67세]. 조선 후기 철종~고종 때 활동한 문신. 이조 판서를 지냈다. 자는 치량(稚亮)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판서박주수(朴周壽)이며,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이호민(李好敏)의 딸이다.

철종~고종 시대 활동

1856년(철종 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57년(철종 8) 2월 홍문록(弘文錄)에 들고,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1858년(철종 9)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860년(철종 11) 윤3월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정사(正使)임백경(任百經)과 서장관(書狀官)이후선(李後善)과 함께 청(淸)나라에 갔다. 그 해 12월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다음 해인 1861년(철종 12) 6월에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62년(철종 13) 8월에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는 고종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에는 병조 참판, 안악군수(安岳郡守), 영변부사(寧邊府使), 이조 참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예조 판서, 형조 판서를 지냈고, 고종이 친정한 이후인 1875년(고종 12)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한 기간인 1875년~1876년은 영남 일대가 연이은 흉년을 맞아 굶주려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와 같은 도내의 민정(民情)을 의정부(議政府)에 장계로 보고해서 재해가 심한 읍면의 사창곡(社倉穀) 납부를 이듬해 가을까지 연기시키고 2,000결을 면세지로 책정 받는 동시에 부민(富民)의 빈민구제를 권장하는 등 진휼대책에 힘썼다. 경상 감사를 지낸 이후 들어와 이조 판서,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음죽(陰竹)에 있다.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이희석(李羲碩)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낳았다. 1남은 박희양(朴憙陽)이다.

참고문헌

  • 『철종실록(哲宗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