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응(朴自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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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9년(선조 22)~1645년(인조 23) = 57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이다. 자는 정길(正吉)이고, 호는 읍백당(挹白堂)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박승종(朴承宗)이며, 어머니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군수(郡守)김사원(金士元)의 딸이다. 증조부는 호조 판서박계현(朴啓賢)이고, 조부는 박안세(朴安世)이며 조모 황씨(黃氏)는 황림(黃琳)의 딸이다. 첫째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심협(沈俠)의 딸이고, 둘째 부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정근(鄭謹)의 딸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14년(광해군 6) 7월 3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고, 7월 24일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으며, 12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3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8월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고, 9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10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론이 대두되자 신병을 핑계로 불참한 하였는데, 이 일로 1619년(광해군 11)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0년(광해군 12)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되었다. 그 뒤 중앙으로 돌아와 홍문관 수찬(修撰) · 정자(正字) · 응교(應敎)헌납(獻納) · 지평(持平) ·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인 1623년(인조 1) 4월 아산(牙山)으로 유배되고, 5월 이재영(李再榮)과 이진(李進)의 공사(供辭)에 의하여 광해조 때 그가 남의 제술(製述)을 빌어가지고 급제했음이 밝혀지자 삭과(削科)되었다. 1628년(인조 6) 9월 진도(珍島)로 이배된 뒤 그 다음해인 1629년(인조 7) 위리(圍籬)만 철거되었다. 1645년(인조 23) 세상을 떠나니 나이 57세이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文科榜目)』
  • 『응천일록(凝川日錄)』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