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안(朴子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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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8년(태종 8) = ?]. 고려 말 우왕~조선 초 태종 때 활동한 무신. 삼도 도체찰사(三道都體察使)를 지냈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고려 우왕~공양왕 시대 활동

1384년(우왕 10) 진주목사(晉州牧使)로서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윤가관(尹可觀)과 함께 함양군(咸陽郡)에 침략해 온 왜적을 쳐서 18급(級)을 베고, 왜적에게 포로가 된 2백여 인을 구하고 기장(器仗: 무기)을 얻었다. 1385년(우왕 11) 11월에도 해도원수(海道元帥)로서 왜구들을 소탕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 6월 경기 연해 절제사(京畿沿海節制使)로서 왜적과 싸워 30여 인을 사로잡아 참(斬)하였다. 1389년(창왕 1) 2월 원수로서 경상도 도원수(慶尙道都元帥)박위(朴葳) 등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왜선 3백여 척을 불태우고 피로된 남·녀 1백여 인을 찾아 돌아왔다. 그 해 6월에는 경기 연해 절제사로서, 그 해 11월에는 전라도 절제사(全羅道節制使)로서 왜구를 무찌르고 포로를 바쳤다.

조선 태조~태종 시대 활동

1393년(태조 2) 좌도 수군도절제사(左道水軍都節制使)가 되어 우도 수군도절제사(右道水軍都節制使)김을귀(金乙貴)와 함께 왜구를 소탕하였다. 1397년(태조 6)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가 되었는데, 진포(鎭浦)에 이르러 군중(軍中)에서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으나, 큰아들 박실(朴實)이 당시 정안군(靖安君: 태종)에게 호소하여 삼척(三陟)에 장배(杖配)되었다.

1400년(정종 2) 11월 정안군태종이 즉위하자,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가서 주문(奏聞)하고, 다음해인 1401년(태종 1) 윤3월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아 돌아왔다. 그 해 12월에는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하륜(河崙)의 헌의(獻議)에 따라 도총제(都摠制)로서 경상도 도절제사(慶尙道都節制使)가 되어 조선(漕船) 만드는 일을 감독하다가 겨울 추위로 중지하였다. 1405년(태종 5) 경상도 병마도절제사(慶尙道兵馬都節制使)와 경상도 수군도절제사(慶尙道水軍都節制使)를 겸하였고, 이어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었다. 1406년(태종 6) 2월 공안부(恭安府)판사(判事)가 되었다가 6월에 파면되었다. 1408년(태종 8) 3월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로서 경기·충청·전라도 수군도체찰사(京畿忠淸全羅道水軍都體察使)가 되었다. 이때에 왜구가 몹시 치성(熾盛)하여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유정현(柳廷顯)이 비보(飛報)하기를, “도내(道內)에 병선수(兵船數)가 적어서 왜구를 당할 수 없으니, 급히 경기의 병선을 내어 추포(追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박자안은 명을 받고 경기의 병선을 거느리고 가서 왜적을 방어하였다. 공안부 판사로서 모화루(慕華樓) 남지(南池)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여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삼도 도체찰사로서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심귀령(沈龜齡)과 함께 전라도에서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궁온(宮醞)을 하사받았고, 태조께서 붕어하자 공안부 판사로서 국장도감(國葬都監) 판사(判事)가 되었다. 1408년(태종 8) 11월 7일 세상을 떠나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를 후히 내리었다. 그는 기위(奇偉)하고 장략(將略)이 있는 무신이었다고 한다.[『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8년 11월 7일 「박자안 졸기」]

시호와 후손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자녀는 2남을 두었는데, 1남은 도총제(都摠制)박실(朴實)이고, 2남은 박유(朴牖)이다. [『태종실록』태종 8년 11월 7일 「박자안 졸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