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손(朴仁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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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환관(宦官). 수양자(收養子)내관(內官)김맹진(金孟津)이다. 거주지는 서울이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성종 때에 궁중에 들어가서 성종과 연산군과 중종을 섬겼다. 그는 연산군 시대에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아 태장(笞杖)을 여러 차례 당하였다. 그 이유는 내관은 술을 마시지 못하게 이미 법을 세워 놓았는데도 술을 마시고, 봉교(奉敎)를 받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전(尙傳)으로 있을 때인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는데 이 사건에 연루되어 운봉(雲峰)으로 부처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2월에 황간(黃澗)으로, 7월에 다시 거제도(巨濟島)로, 1506년(연산군 12) 3월 제주도(濟州道)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는 이렇게 여러 곳으로 이배되면서 심한 형벌을 받았다.

중종이 즉위한 뒤인 1507년(중종 2) 2월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책록하고 노비 12인을 내려주었다. 다음해인 1508년(중종 3) 12월 진천군(鎭川君)에 봉하였다. 그는 임금의 은총을 받았는데도 노비 13인을 더 모점(冒占)하는 등 행패가 심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10년(중종 5) 다시 서용되어 국왕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는데, 그는 자중하지 않고 오히려 위세를 부려 1517년(중종 12) 이어소(移御所) 동구(洞口)의 군사가 지키는 곳에서, 말을 탄 채로 들어가다가 도리어 제지하는 당직 군사를 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다시 대간에 의하여 탄핵을 받아 직첩을 빼앗기고 궁궐에서 추방되었다.

박인손의 성품에 관하여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그는 성질이 본래 완악 오만하여 명령을 받들지 않은 일이 많다. 그리고 삼가는 마음은 없고 경박한 행실이 있다.”고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5월 16일, 연산군 11년 7월 7일]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