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현(朴而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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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4년(중종 39)~1592년(선조 25) = 49세]. 조선 중기 선조 때에 활동한 의병장. 자는 여수(汝粹)이다. 증직(贈職)은 공조 판서(判書)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인데, 아버지는 참봉(參奉)박대영(朴大榮)이고,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박하담(朴河淡)의 딸이다. 박팽년(朴彭年)이 그의 방계(傍系) 할아버지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는 서생(書生)으로서 국사(國事)가 다급한 것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동지를 모아 의병(義兵)을 일으켜 경상도 성주(星州) 가천(伽川)에서 왜적을 토벌하였다. 그때 제봉(霽峯)고경명(高敬命)도 의병을 일으켜 그와 같이 앞뒤에서 진을 치고 성원(聲援)하면서 여러 차례 왜적과 싸웠다. 왜적이 울산(蔚山)으로 들어가자, 부사(府使)배응경(裵應褧)이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패배를 당하여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참살한 적의 머리를 배응경에게 주어 처벌을 면하도록 해 주었다. 이 해 10월에 왜적이 가천을 조여들자 그가 힘써 방어하다가 저녁 무렵에 패배하여 이내 전사하니, 이때 나이 49세이다.

성품과 일화

박이현은 소년시절부터 지기(志氣)가 있고 의리를 좋아하여 향리에서 명성이 났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바다를 건너 들어오자,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일으킨 그는 참살한 왜적의 머리를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이웃 고을에 넘겨주어, 한 장의 직첩(職牒)도 얻지 못하여 기회를 잃을 뻔 한 사람[배응경]의 죄를 면하게 해 주었다. 그가 가진 뜻은 순수한 충성뿐이었으므로, 공명(功名)이나 영리(榮利)같은 것이 모두 그 뜻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그의 뜻이 이와 같았기에 그의 셋째아들 박영서(朴永緖)도 <이괄(李适)의 변란>에 순절하였던 것이다.

추증과 제향

1742년(영조 18) 12월에 조정에서 의민(毅愍)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광덕(李匡德)이 시장(諡狀)을 지었다. 선조가 그의 전사(戰死) 소식을 듣고 공조 참의(參議)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고, 그 뒤에 아들 박영서(朴永緖)가 순국하자 공조 판서(判書)로 높여 추증하였다. 성주 덕봉사(德峰祠)에 제향 되었다. 부인 칠곡도씨(漆谷都氏)는 우후(虞候)도흠조(都欽祖)의 딸인데, 4남을 두었다. 1자는 박종서(朴宗緖)이고, 2자는 군기시(軍器寺) 판관(判官)박흥서(朴興緖)이고, 3자는 박영서(朴永緖)이고, 4자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박윤서(朴潤緖)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관양집(冠陽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