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朴永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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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9년(선조 12)~1624년(인조 2) = 46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무신. 창성부사(昌城府使)를 지냈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박이현(朴而絢)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박영서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다음에 1620년(광해군 12)에 옥구현감(沃溝縣監)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 때 원수(元帥)장만(張晩)의 군사를 따라 반란군의 후미를 좇아 황해도 황주(黃州)의 신교(新橋)에 이르러 이들과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관군인 원수의 군사들이 겁을 내어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홀로 분격하여 용맹을 뽐내며 말을 달려 적진인 이괄의 진중(陣中)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하여 거의 이괄을 잡을 뻔했는데, 갑자기 말이 넘어져 포로가 되었다. 이때 이괄이 그에게 항복을 받고자 하였다. 반란군인 이괄의 장수 한명련(韓明連)이 그의 용력(勇力)을 아껴 감언이설로 꾀니, 그는 대노(大怒)하여 자기 손으로 타던 말을 베며, “내가 너에게 잡히게 된 것은 이 말 때문이다.” 하고, 마구 꾸짖으면서 꺾이지 않았다. 한명련이 또 초모(貂帽)를 그 머리에 씌워주니, 그는 머리를 흔들어 초모를 떨어뜨리며,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역적의 초모로 충신의 머리를 더럽힐 수는 없다.” 하였다. 반군들이 그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긴 칼로 찍어대니 살갗과 살적이 조각조각 땅에 떨어졌는데,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여전히 꾸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인조가 이 사실을 듣고 탄석(歎惜)해 마지않았으며 특별히 병조 참판을 증직하고 또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시호와 증직

1742년(영조 18) 나라에서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렸다. 사후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고, 향리에 정려(旌閭)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만력 30년 임인년 10월 22일 문과 방목(萬曆三十年壬寅年十月二十二日文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