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창(朴永昌)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연산군~중종 때 활동한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파주목사(坡州牧使)를 지냈다. 아버지는 전한(典翰)박휘(朴輝)이며,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영의정(領議政)구치관(具致寬)의 딸이다. 공조 판서를 지낸 박영문(朴永文)의 형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503년(연산군 9) 3월 감찰(監察)로 있으면서 종친계후노비(宗親繼後奴婢)의 속공(屬公)에 반대하였다. 그는 김포현령(金浦縣令)으로 있을 때인 1505년(연산군 11) 7월 내관(內官)의 족친으로 궐내(闕內)의 소문을 퍼뜨렸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인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반정주동자의 한 사람이던 아우 박영문의 권유에 따라 반정군(反正軍)에 가담하여 1506년(중종 1) 9월에 정국공산(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천령군(天嶺君)에 책봉되었으며, 1509년(중종 4)에는 파주목사(坡州牧使)까지 역임하였다. 1513년(중종 8) 10월에 신윤무(辛允武) · 박영문(朴永文)의 모반사건(謀反事件)이 있었는데, 그는 그 일족(一族)으로 연좌(緣坐)되어, 중죄인으로 몰려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고 유배되었다. 그 뒤 그의 집에서 호소하였기 때문에 1519년(중종 14) 5월 19일 석방되었다. 1522년(중종 17) 11월 그의 아들 생원(生員)박유(朴瑜)가 상소하여 아버지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도로 달라고 청원하였는데, 임금은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였기 때문에 환급하고자 대신에게 수의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삼공이 의논드리기를 “그는 중죄에 연좌된 사람으로 사유(赦宥)를 받은 것만도 족하니 그에게 공신녹권을 주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17년 11월 13일)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대하여는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파주목사가 되었을 때 간원이 아뢰기를 “그는 성품이 본래 망패(妄悖)하여 백성을 다스리기에 맞지 않습니다. 청컨대 속히 개정하소서.”라고 하였고[『중종실록』중종 4년 6월 26일], 또 다시 아뢰기를 “그는 망령되고 패덕스러워 그 소임에 맞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중종실록』중종 4년 7월 1일]

후손과 추증

부인 박씨(朴氏)는 박병중(朴秉中)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1남은 박유(朴瑜)이다. 사후에 공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 『음애집(陰崖集)』
  • 『충재집(冲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