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옥(朴成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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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90년(숙종 16)~ 1743년(영조 19) = 54세]. 조선 후기 영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다.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만명헌(晩命軒)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박희민(朴希閔)이며,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권태행(權泰行)의 딸이다.

영조 시대 활동

1719년(숙종 45)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고, 1725년(영조 1)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는 향인(鄕人)의 의병장이 되어 정부군과 합세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협력하였다. 1742년(영조 18) 3월 지평이 되었다. 그 해 8월 상소를 통하여 임금의 탕평책(蕩平策) 실시에 노심초사함을 찬양하였다. 한편 소를 올려, 아첨하고 성실하지 않은 풍습을 바로 잡을 것, 지방 수령들의 탐오(貪汚)가 날로 심하여지므로 이를 엄단할 것, 북관유민(北關流民) 중 서울에 들어온 자들에게 식량을 배급하여 쇄환(刷還)하도록 할 것 등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때 여역(癘疫)의 기운이 아직도 채 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에게 능행(陵行)의 기일을 물려서 하기를 청했다가 체직되었다. 그는 평소 글에 능하였는데, 유고(遺稿)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박성옥은 인품이 검약하고 자신에게 엄격하였으며, 효우(孝友)가 돈독하였으나, 세상일에는 서투른 점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예천읍지(醴泉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