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1658-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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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8년(효종9)~1715년(숙종41) = 58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형성(衡聖), 호는 귀암(歸菴)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목사(牧使)박시경(朴時璟)의 아들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86년(숙종12)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 1694년(숙종20)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정법(正法)대로 처형할 것을 주장하다가 체직(遞職)되었다. 그러나 다시 서용되어 삼관(三館)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교리(校理)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697년(숙종23)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1702년(숙종28)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는데, 뒤이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707년(숙종33)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1708년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었는데, 이때 강화의 진강목장(鎭江牧場)을 혁파하였다. 1710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이듬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712년(숙종38)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의 접반사(接伴使)로서 백두산(白頭山)에 가서 조선(朝鮮)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고,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그해 병조참판·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형조 판서를 거쳐 1713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대사헌(大司憲)·병조판서를 지냈다. 1714년 이조판서에 오르고, 1715년(숙종41) 예조판서를 거쳐서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무과(武科) 시험을 관장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으니, 나이가 58세였다.

백두산정계비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만주족(滿洲族)의 발상지로 알려진 백두산 천지(天池)에 몇 차례 직접 올라가서 답사하면서 어제시(御製詩)를 짓고, 조선과 국경선이 모호한 것을 염려하여, 1712년(숙종38) 만주의 우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을 현지에 보내어 토문강(土門江)의 발원지를 조사하여, 변방의 경계를 정하게 하였다. 만주족은 토문강을 두만강(豆滿江)으로 여겼다. 조선의 숙종(肅宗)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알지 못하고, 임기응변에 능한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임명하였다. 우라총관 목극등은 그 일행을 데리고 만주의 우라성에서 바로 백두산으로 왔다.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이선부(李善溥)가 목극등 일행을 함경도 삼수부(三水府)의 연연(蓮囦)에서 만났다. 목극등은 박권과 이선부를 보고 너무 늙어서 높은 산에 오를 수 없다고 고집하고, 김응헌(金應瀗)·김지남(金指南)·김경문(金慶門) 등 통역관 몇 사람만을 차출하여 일행 40여 명을 이끌고 백두산에 올랐다. 그리고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의 수원(水源)을 찾아내어 자기 마음대로 국경을 정하려고 하였다. 이때 역관(譯官)김지남의 아들 김경문이 나서서,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강으로써 경계를 삼는 것은 예전부터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두 강의 수원(水源)은 백두산 꼭대기의 호수에서 나오는데, 호수의 북쪽은 중국 지경이고, 그 남쪽은 우리 땅입니다.” 하고,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고 목단강(牧丹江)이라고 유창한 중국어로 목극등을 설득하였다. 마침내 목극등도 이를 인정하고 그 오류(誤謬)를 시정하였다. 김지남 부자는 목극등 일행을 인도하여 산꼭대기까지 답사하고 호숫가에 비석을 세워서 경계로 삼았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한·중 양국 사이에 국경 논쟁의 근거가 되는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다. 최근에 이 비가 감쪽같이 사라져서 지금은 없다. 목극등은 백두산의 형세와 강역(彊域)을 그린 지도(地圖) 2본(本)을 만들어서, 하나는 청나라 강희제에게 바치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에 주어서 보관하여 후일의 증거로 삼도록 하였다. 수역관(首譯官) 김지남은 당시 약 90일 동안의 일기(日記)를 남겼는데, 이것이 『북정록(北征錄)』이다. 실제로 백두산에 올라가서 현장을 보지도 못하였던 박권도 자기 변명을 위하여『북정일기(北征日記)』를 남겼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강원도 원주(原州) 사제면(沙堤面) 선영(先塋)에 있는데, 이여(李畬)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전라도 무안(務安)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북정일기(北征日記)』
  • 『북정록(北征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임하필기(林下筆記)』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약천집(藥川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