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배향(文廟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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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의 배전(配殿)인 동무(東廡)서무(西廡)에 후대 유현의 위패를 봉안하여 석전(釋奠) 때 함께 제사하는 일.

개설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는 문묘(文廟)에 후대의 유현(儒賢)을 배향하는 전례는 동아시아의 전근대 왕조에서 매우 중요한 의전이었다. 이는 당대의 왕조에서 문교(文敎)를 중시하고 유현을 높인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중국 송대의 몇몇 유현을 추향하는 일도 포함되지만 주로 동방 오현(五賢)을 포함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을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은 유림의 표상이 되어 많은 존경을 받았고, 그 후손이나 제자들에게는 크나큰 영광이 되었다. 문묘배향은 일반적으로 성균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공론에 따라 조정에서 논의되고 국왕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특정 유학자의 문묘배향을 두고 조정과 재야에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정쟁의 향방에 따라 배향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배향과 철향(撤享), 복향(復享)을 두고 남인과 서인이 극심하게 대립하였다. 또 박세채(朴世采)의 문묘배향은 유림의 공론을 기다리지 않고 국왕인 영조(英祖)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소론과 노론이 갈등을 벌이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의 유현으로는 고려 때인 1020년(고려 현종 11)에 처음으로 최치원(崔致遠)을 문묘에 배향하였고, 1022년에는 설총(薛聰)을 배향하였으며, 1319년(고려 충숙왕 6)에는 안유(安裕)가 배향되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며 충신이었던 정몽주(鄭夢周)는 조선 왕조에 들어와 100여 년이 지난 1517년(중종 12)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전 왕조의 충신을 표창하여 배향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그가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창시자이며 강상의 표상으로 추앙되어 성균관 학생들과 관료들의 끈질긴 요청으로 실현되었다. 이후 조선조 5현으로 칭송되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의 배향과 양현(兩賢)으로 불린 이이와 성혼 그리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 동국(東國) 18현의 배향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발단

동국 18현의 문묘배향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이와 성혼의 양현 종사(從祀)와 박세채의 배향이었다. 이것은 동서 분당 이후 격화된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당쟁 및 노론(老論)소론(少論)의 갈등 때문에 분쟁이 크게 일어났으며, 이들의 문묘배향 때문에 당쟁도 더 심화되었다. 이이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에 잠시 불교에 입문했던 것이 이단(異端)에 빠진 학자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성혼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길에 그의 집 앞을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호종(扈從)하지 않았던 것이 구실이 되었다. 그들의 문묘배향은 사림의 공론에 의해서라기보다 남인과 서인의 당쟁 향배에 따라 좌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과

1517년(중종 12)에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는 과정에서 사림은 조선시대 도학의 토대를 닦은 김굉필의 배향도 함께 요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가 조광조의 스승이었다는 점이 중종(中宗)에게 흔쾌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림의 시대에 들어선 선조대에는 선현들의 문묘 종사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570년(선조 3)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 4현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제기되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선조실록』 3년 4월 23일) 1570년에 이황이 죽고, 그 3년 후인 1573년부터 유생들은 앞의 4현과 이황을 합친 5현의 배향을 추진하였다. 이후 20여 차례에 걸쳐 유생들의 상소와 신하들의 요청이 있었으나 선조는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경솔히 허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끝내 응하지 않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경상도 유생 이전(李㙉) 등이 5현의 배향을 상소한 것을 시작으로(『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7월 2일) 전국의 유생들이 계속하여 상소하였고, 특히 1610년(광해군 2)에는 유림의 상소가 폭주하고 대간(臺諫)을 비롯한 조정 신하들의 요청도 강경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그해 7월 16일 배향을 허락하고, 9월에 위패의 봉안 의식을 거행토록 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다음 해인 1624년(인조 2)에는 서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정에서 이이(李珥)의 문묘배향이 건의되었고, 1635(인조 13)에는 송시형(宋時瑩) 등의 유생들이 성혼(成渾)과 아울러 양현의 종사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두 사람의 평판에 논란이 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서인들은 지속적으로 배향을 요청하였으나 남인들은 이이의 불교 전력과 성혼의 왜란시 허물을 비판하며 반대하였다. 두 사람의 종사는 이후 50여 년간 서인과 남인들 간의 당론으로 논란이 지속되다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들이 일망타진 된 후인 1682년(숙종 8)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그 해 3월에 이이와 성혼의 위패를 문묘에서 퇴출시키는 출향(黜享) 조치가 단행되었다. 그러나 지방의 향교에서는 이에 저항하여 출향을 시행하지 않은 곳도 많았다. 다시 5년 후인 1694년(숙종 20) 3월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그 해 6월에 두 사람을 다시 문묘에 배향하는 복향이 이루어졌다. 이때도 사림에서 반대하는 상소가 많았지만, 서인들은 그들을 처벌하고 복향을 관철하였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배향은 당쟁의 향배와 관련되어 많은 분란과 갈등을 유발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은 서인 집권기인 1688년(숙종 14)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은 1744년(영조 20)에, 송준길은 1756년(영조 32)에 배향되었는데 당시의 집권 세력에 의해 추진되었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야기되지 않았다.

탕평론의 제창자였던 소론 출신 박세채(朴世采)는 1764년(영조 40)에 배향되었는데, 이는 성균관 유생들의 건의도 없이 영조가 독단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영조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리고 박세채의 배향을 추진하여 노론의 불만을 샀으나 기정사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김인후(金麟厚)는 1796년(정조 20)에 배향되었고, 1883년(고종 20)에 조헌(趙憲)과 김집(金集)이 마지막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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