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교(文德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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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1년(명종6)∼1611년(광해군3) = 61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문신이고, 함경도 유학자. 자는 가화(可化), 호는 동호(東湖)이다. 본관은 개령(開寧)이고, 주거지는 함경도 함흥(咸興)이다.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봉사(奉事)문오(文鰲)이고, 어머니 전주주씨(全州朱氏)는 승사랑(承仕郞)주몽선(朱夢宣)의 딸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73년(선조6) 사마시(司馬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1585년(선조18) 식년 문과(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 교서관(校書館)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參下)의 여러 관직을 거치고 차례대로 승진하여 정6품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형조 좌랑을 거쳐, 1602년(선조35) 흥덕현감(興德縣監)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의 관료는 삼남(三南)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함경도라는 그의 출신 지역이 중앙에서 벼슬길에 진출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계를 절감하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문명은 함흥만이 아니라 중앙에서도 높았다.

1610년(광해군2) 한준겸(韓浚謙)은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여 학교를 세우고 『소학(小學)』 · 『가례(家禮)』등을 간행 보급하여 북방 지방에 학문을 진흥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를 불러 함흥부(咸興府)의 제독교수(提督敎授)에 임명하여 학당(學堂)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유학을 보급하게 하였으므로, 문덕교는 북방 지역에 유학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준겸이 번번이 만류하는 바람에 몸이 아파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애써 관아에서 학도를 가르치다가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1611년(광해군3) 10월 25일 함흥의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1세였다.

저서로는 『동호유고(東湖遺稿)』(혹은 『동호집(東湖集)』)가 있다.

성품과 일화

문덕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와 태도가 아름답고 재능이 많았으며, 말과 글이나 뜻에 여유가 있었다. 의정부 사인(舍人)한주(韓澍)가 명종 때에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함경도 이성현(利城縣)으로 귀양을 왔는데, 이웃 고을에 살던 김기문(金起文) · 김준(金遵) 등이 그에게 수학하면서, 마침내 북쪽 변방에서 이름난 학자가 나오게 되었다. 문덕교는 바로 김기문에게 수학하였는데, 김기문이 돌아가자 그를 위하여 3년간 심상(心喪)하고, 늙어서까지 기일이 되면 재계(齋戒)하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아버지 문오와 아우 문선교(文善敎)가 왜적에게 살해되자, 문덕교는 함흥에서 가장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함경도에 침략한 왜군과 싸웠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자기가 지은 『임진록(壬辰錄)』에다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창의사(彰義祠)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667년(현종8) 그 사실이 밝혀져서 추가 배향되었고, 1734년(영조10) 사헌부 집의(執義)이종백(李宗白)의 주청으로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되었다.

묘소와 후비문

묘소는 함경도 함흥(咸興)의 선영에 있는데, 함경도관찰사한준겸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이고, 둘째 부인은 같은 고을의 장흥위씨(長興魏氏)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호유고(東湖遺稿)』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오산집(五山集)』
  • 『약천집(藥泉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풍석전집(楓石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