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東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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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단종과 사육신 등의 추모각이 설치된,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계룡산에 있는 절.

개설

동학사(東鶴寺)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초에 도선(道詵) 국사(國師)가 중창하였다. 고려의 건국 공신 유차달(柳車疸)이 박혁거세의 사당을 봉안하고 동학사라고 하였다. 조선초 고려 왕족을 위한 제사를 지내면서 절의 역사는 원혼을 위로하는 기도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 등이 초혼각(招魂閣)을 세워 단종(端宗)에 대한 제사를 봉행, 3년 동안 복상(服喪)하였다. 세조가 절을 찾아 단종을 비롯하여 왕위 찬탈 과정에서 자신이 죽인 280여 명의 초혼제(招魂祭)를 봉행하였다. 19세기 초 절은 서원으로 변하였다. 왕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으므로 유자(儒者)들이 강제적으로 절의 간판을 내리고 동학서원(東學書院)으로 바꿨다. 1836년(효종 2) 서원을 관리하던 유생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서원을 몰수하여 다시 사찰로 환원시켰다. 19세기 말에는 만화보선(萬化普善)과 경허성우(鏡虛惺牛) 등의 고승이 주석하며 교학과 참선 수행 풍토를 정착시켰다. 오늘날 절은 대표적인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유명하고, 역사의 중심을 이끌어 왔던 초혼각은 숙모전(肅慕殿)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신라시대인 724년(신라 성덕왕 23) 회의(懷義) 화상이 청량사(淸凉寺)로 창건하였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상원(上願) 화상이 암자를 짓고 살았다. 고려시대 들어 920년(고려 태조 3) 도선 국사가 중창하였고, 이때 태조왕건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고려 태조 19) 고려 건국의 공신 유차달이 절에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제사를 지냈다. 이들을 봉안한 사당을 짓고, 절을 중창하여 비로소 동학사로 개명하였다. 절이 계룡산의 동쪽에 있고, 절 인근에 학을 닮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학사(東學寺)로 쓰고 있다.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원조인 정몽주(鄭夢周)를 절에 배향한 인연에서 비롯된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2) 조선전기

조선시대 들어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절에서 고려 왕족과 정몽주를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1399년(정종 1)에는 역시 고려의 유신 유방택(柳方澤)이 목은(牧隱)이색(李穡), 포은(圃隱)정몽주, 야은(冶隱)길재 등 고려 충신의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듬해 공주의 지주사(知州事)로 부임한 이정간(李貞幹)이 이를 기려 제단에 전각을 세워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여기서 비롯되어 3인을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1457년(세조 3) 김시습, 정지산(鄭之産), 조상치(曺尙治) 등이 절에 초혼각을 세워 단종의 위패를 모시고 3년 동안 복상하였다. 아울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사육신(死六臣)의 초혼제를 지냈다. 이후 세조가 절을 찾아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죽은 280여 명의 초혼제를 봉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작성한 초혼기(招魂記)는 1719년(숙종 45)에도 여전히 초혼각에 남아 있었다(『숙종실록』 45년 4월 30일). 1665년(현종 6)에는 송시열(宋時烈), 윤선거(尹宣擧), 이유태(李惟泰) 등의 유학자들이 절에 모여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13년 4월 14일).

(3) 조선후기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초혼각은 물론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후 중건되었다가 18세기 후반에는 정후겸(鄭厚謙)이 초혼각의 제위전(祭位田)을 몰래 팔아 제사가 중단되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 15) 국왕과 신하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의 의례를 논하면서 절의 초혼각 이야기가 등장한다. 즉 억울한 원혼을 추모하는 제사로서는 동학사의 예가 바람직하다고 하였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1814년(순조 14)에는 주지 월인(月印)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전각을 중수하고 세조의 초혼기를 봉안하기 위해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새로 지었다. 이후 절은 서원으로 변하였다. 명확한 과정은 전하지 않으나 왕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으므로 유자(儒者)들이 강제적으로 절의 간판을 내리고 동학서원으로 바꾼 듯하다. 그런데 1836년(효종 2) 서원을 관리하던 정규흠(鄭奎欽)이라는 자가 유생들과 다툼을 일으키자 국왕이 이를 처결하는 과정에서 동학서원을 몰수하여 다시 동학사로 고치고 승려들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하였다(『헌종실록』 16년 4월 20일). 고려말 충신들의 영혼을 천도하는 삼은각에서 비롯하여 조선시대에도 국가의 제사 사찰로 발전하였지만, 이 때문에 절은 폐사되었다가 다시 복원되는 등의 곡절을 겪었다.

1864년(고종 1)에는 만화보선이 가람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옛 건물을 모두 헐고 전각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다. 초혼각은 1904년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만화는 당시 대강사로 유명하였다. 근대 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경허성우가 이곳에서 그에게 교학을 배웠다. 경허는 1871년(고종 8) 첫 강석(講席)을 동학사에서 시작하여 9년간 진행하였는데 수많은 학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만화와 경허에게서 시작된 절의 강원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도의 운문사(雲門寺)와 더불어 대표적인 비구니 수행 도량이다. 절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초혼각 즉 숙모전이 여전히 남아 있어 단종과 삼은, 사육신과 김시습 등 모두 15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참고문헌

  • 박남수·심대섭·최응천, 『갑사와 동학사』, 대원사, 1999.
  • 박세연, 『조선초기 세조대 불교적 상서의 정치적 의미』, 『사총』74,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1.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12, 대전·충남의 전통사찰Ⅰ』, 사찰문화연구원, 1999.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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