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직(盧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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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5년(인종1)~1618년(광해군10) = 74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자는 사형(士馨)이다. 아버지는 남평현감(南平縣監)노홍우(盧弘祐)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대사헌김희수(金希壽)의 딸이다.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노언방(盧彦邦)의 손자이고, 예조 판서노직(盧稙)의 동생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4년(선조1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0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가 글씨를 잘 쓴다고 하여 특별히 승정원 주서(注書)로 발탁하였다. 공조 · 형조 · 예조 · 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사간원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587년(선조20)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가 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 1588년(선조21)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이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이듬해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인사 행정을 담당할 때 우의정정철(鄭澈)이 노직을 불러서 자기 사람을 임명하도록 지시하여 물의를 빚었다. 1590년(선조23)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 등을 지냈고, 이듬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할 때 호종(扈從)을 하였는데, 평양에서 낙마(落馬)로 부상 당하는 바람에 영변(寧邊)에서 뒤떨어졌다. 나중에 성천(成川)에서 행재소(行在所)에 합류하자, 선조가 병조 참판으로 임명하였다. 1593년(선조26)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임명되었는데, 명(明)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 10만여 석을 공급하였다. 1595년(선조28)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29)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일본의 재침 우려를 알리고, 명나라 측으로부터 왜군이 재침할 경우에 군사의 파견과 군량미 공급을 확약 받는 데에 성공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서 영의정유성룡(柳成龍)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전군을 지휘하자, 노직은 부체찰사(副體察使)가 되어서 군국(軍國)의 대사를 함께 도모하였다. 그때 훈련도감 당상관으로서 경강(京江: 한강)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임하였다. 전쟁 중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행 대호군을 거쳐, 세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고,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마침 명나라에서 형부(刑部) 상서(尙書)형개(邢玠)를 동국(東國) 군문(軍門)에 임명하여, 그가 명나라 군사를 총지휘 감독하러 조선에 왔다. 이때, 노직은 접반사(接伴使)의 부사(副使)가 되어서 군문형개를 맞이하여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군사 협력 문제를 함께 논의하였다. 1599년(선조32) 전쟁이 끝나고 군문형개가 명나라로 돌아가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고,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하였으며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이어 1600년(선조33)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이때 노직과 함께 이정귀(李廷龜)가 추천되었으나 선조는 노직을 낙점(落點)하였다. 1600년(선조33) 선조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의 상을 당하여, 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 이어 이조 판서로 옮겨 세자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임하였다. 1601년(선조34)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1603년(선조36)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하고, 의정부 우참찬(右參贊)로 승진하였고,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판서로 옮겨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다. 1604년(선조37)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1607년(선조40)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로 나갔고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608년(선조41) 2월에 선조가 승하하자, 전서(篆書)로 그 명정(銘旌)을 썼다.

왜란 때 노직의 활동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점차 서울로 접근해 오자, 선조는 의주로 몽진할 것을 결심하고, 승지노직 등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위판(位版)을 받들고, 궁인(宮人)들을 호위해서 먼저 길을 떠나도록 하였다. 이때 도성 안의 하급 관리와 백성들이 난동을 일으켜 노직 일행의 길을 가로막고 종묘사직의 위판을 모시고 뒤따르던 신하들을 가리키면서 “너희들이 평일에 국록(國祿)만 훔쳐 먹다가, 이제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속이기를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하였다. 또 많은 군중이 행궁(行宮)의 문 앞에 모여들어 부르짖기를, “이미 성을 버리려고 했으면서 무엇 때문에 우리를 속여서 성에 들어오도록 하여, 우리들만 적의 손에 어육(魚肉) 신세가 되게 하는가?” 하였다. 모두 병장기를 든 채 소란을 피웠는데, 노직은 그 혼잡스런 상황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성난 군중을 피하여 성 밖에서 기다리다가,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 일행을 만나서 호종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는 말에서 떨어져서 심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일행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서 영변(寧邊)에서 뒤떨어졌다. 그러나 승지민여경(閔汝慶)과 노직 등이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고 여겨 병을 핑계하고 먼저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듣고 호종하다가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노직은 부상에서 회복되자 성천(成川)으로 달려가서 행재소에 합류하였는데, 선조가 그를 병조 참판에 임명하였다.

1593년(선조26)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명나라 장수들이, “개성부에 먼저 10 만여 석의 곡식을 비축하면 군대를 전진시킬 수 있다.”고 하여 노직은 군량미를 준비하고 남하하는 명나라 군사를 맞았다. 그러나 개성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하여 거의 모두 도망쳐버렸다. 1596년(선조29) 주문사로서 여우길(呂祐吉)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일본이 다시 침략할 것이라고 알리며 군사와 양식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명나라 측으로부터, “왜군들이 만일 재차 군사를 출동한다면 중국에서도 군사를 파견하고 군량미를 보낼 것이다.”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이 일어나서, 영의정유성룡이 체찰사를 맡아 전체 군사를 지휘하자, 노직은 부체찰사를 맡아서 군사 동원과 작전 계획 등을 함께 의논하였다. 마침 명나라에서 형부 상서형개가 동국 군문으로 명나라 군사를 총지휘 감독하러 조선에 왔다. 접반사(接伴使)김명원(金命元)과 부사노직은 군문형개를 맞이하여 조선군과 명나라군 사이의 작전 협의를 함께 논의하였다. 군문형개는 노직이 군사 작전에 아주 유능하다고 항상 칭찬하였는데, 다음해에 노직이 경상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자, 군문형개가 굳이 붙잡아 관찰사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1599년(선조32) 전쟁이 끝나자 노직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형개를 의주에서 전송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즉위)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대간의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 선조가 승하하였을 당시에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궁성의 호위를 엄하게 하여 세자 광해군을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북인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이 대간을 동원하여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의 실세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광해군 초기에 그는 몇 년 동안 집에서 칩거하며 정권에서 멀리 떨어져 지냈다. 1614년(광해군6) 대북파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를 일으키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서인들이 이에 극렬하게 반대하자, 북인 정권은 다시 동인을 조정에 끌어들여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어 노직은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다시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때 강화도 교동(喬洞)으로 유배된 능창대군(綾昌大君)이전(李佺)이 죽었는데, 서인들은 경기도관찰사노직이 능창군을 죽였다고 비난하였다.

1615년 중추부 판사로 있던 노직은 나이 70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당시 대신들은 나이 70세가 되면, 치사(致仕)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는 중추부 판사의 직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617년(광해군9) 대북파는 인목대비를 폐하는 문제를 의정부에서 의논하게 하였다. 중추부 판사노직은 경솔히 처리할 수 없다면서 서인들처럼 반대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미 노병으로 자리에 누워서 지냈으나, 조정의 중의(衆意)에 떠밀려서 폐모론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1618년(광해군10) 그는 우의정한효순(韓孝純)과 함께 백관들을 인솔하고 정청(庭請)하여 폐모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618년 12월 20일 정침에서 죽으니, 향년이 74세였다.

본래 글씨를 잘 썼는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특히 뛰어났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남의 뜻에 거슬리지 않도록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지키는 바는 분명하였고, 또 남의 과실이나 악한 점을 말하지 않았다. 평생 벼슬을 하였으나, 남이 다가오는 대로 내버려두었을 뿐이고, 자기가 마음을 먹고 먼저 다가서는 일은 없었다. 나이 8세에 아버지 노홍우가 돌아가자, 어른처럼 울부짖으며 통곡하고 죽을 먹고 간장을 먹지 않았다. 장사를 치른 다음에 어머니 김씨가 어린 아들이 허약한 것을 걱정하여 영양분이 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도록 권하였으나, 끝내 그 음식을 먹지 않고 3년 상기(喪期)를 끝마쳤다. 조금 자라자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큰 형 노직을 아버지처럼 받들며 그 가르침을 받았는데, 외부 스승에게 나아가서 배우지 않았으나 학업이 날로 발전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길에서도 형과 함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형을 섬기고 따랐는데, 형제가 나란히 판서의 지위에 올랐다.

1615년(광해군7) 노직이 경기도관찰사였을 때,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구시백(具峕伯)이 별장이응성(李應星)을 시켜 능창군이전을 강화도 교동(喬洞)으로 압송하면서, 그에게 큰 칼을 씌워 말에 태워 달리게 하였다. 이전이 결국 말에서 굴러 떨어져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는데도, 그를 치료하지도 않고 구들장[片石]만 있는 차가운 냉방에다 가두었다. 또한 교동현감(喬桐縣監)황정열(黃廷說)은 음식을 주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며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을 주도록 했다. 마침내 이전은 괴로움에 자살을 하였다. 이에 서인들은 경기도관찰사노직이 능창군을 죽였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졸기」에, “노직은 본래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이다.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이조와 병조의 장관이 되어서 인사 행정을 담당하면서 남의 청탁을 받아서 뇌물이 문 앞을 가득 메웠으므로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부자가 되었다.”라는 평가가 있다. 이는 그가 광해군 때 북인(北人)에게 협력하여 폐모론(廢母論)에 앞장섰기 때문에 나중에 서인 사관(史官)들로부터 악평을 받았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개군산(介軍山) 향동(香洞)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의 부탁으로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심의검(沈義儉)의 딸이고, 낙봉(駱峯)신광한(申光漢)의 외손녀인데, 자녀는 1남을 두었으니, 노병준(盧並俊)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우복집(愚伏集)』
  • 『간이집(簡易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재사초(寄齋史草)』
  • 『백사집(白沙集)』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운암잡록(雲巖雜錄)』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죽창한화(竹窓閑話)』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