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세(路浮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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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이 왜관에 출입하는 조선인에게 수출이 금지된 품목의 납입을 의뢰하면서 준 밀무역을 위한 융자금, 즉 왜채를 말함.

개설

밀무역을 위한 융자금을 지칭하는 말로, 일본어의 ‘노보세긴[登せ銀]’에서 나온 것이었다.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 노부세는 왜채(倭債)를 말하며 왜관에서 조선 상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있었던 불법적인 밀무역의 부산물이었다.

노부세 금지의 연혁

노부세의 정확한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으로 수출금지품목이 존재함에 따라서 밀무역이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한 그 수단으로 노부세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기원은 조선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특히 왜인의 상경이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왜인이 왜관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조선후기에는 노부세가 밀무역을 위한 필수 수단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노부세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밀무역 방지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을 것이다.

노부세에 관한 최초의 규정은 1653년(효종 4) ‘금산입각방약조(禁散入各房約條)’ 및 ‘왜인서납약조(倭人書納約條)’였다. 이 약조는 당시 동래부사임의백(任義伯)이 왜관의 관수 및 대관 등과 협의를 거듭하여 제시한 최초의 통상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간단하게 2개의 조항으로만 되어 있었다. 즉, ‘금산입각방조약’은 조선이 오로지 왜관에 출입하는 관리와 상인 등을 적용 대상으로 하여 만든 조문이라면 ‘왜인서납약조’는 대마도측이 왜관주재자를 대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물론 이 양자는 기본적으로는 쌍방의 합의가 전제되어 있지만 각각의 내부 사정에 따라 조문의 표현과 처벌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금산입각방약조’에는 종전에 이미 일본인에게 빚을 진 자는 비록 그 모두를 법으로 다스리기 어렵지만, 1652년 이후로 비밀리에 왜채를 쓴 자는 빚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극률(極律)로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왜인서납약조’에서는 적용 기간과 처벌 규정 등이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가 되면 노부세 문제에 대해서 왜인과의 사이에 조금 더 명확한 약조가 만들어졌다. 바로 ‘여왜정약(與倭定約)’인데, 첫째,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인에게 부채를 진 자는 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극률로 다스린다. 둘째, 왜인으로 몰래 돈을 빌려주는 자는 대마도에 통보하여 한결같이 법에 따라 처벌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것은 위반자 쌍방을 극률에 처한다는 규정으로 이후 1683년(숙종 9)에 맺어진 계해약조의 제2조 내용과 같았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약조문에 ‘노부세’라고 하는 자구는 없고, ‘잠상부채(潛商負債)’, ‘잠자대채(潛自貸債)’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비변사등록』 숙종 원년 7월 28일조에 노부세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즈음에는 조선의 관리나 상인의 일부에서 노부세라는 용어가 상당히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683년 계해약조에서는 노부세라는 말이 정착하여 약조의 조문에 등장하게 되었다. 계해약조의 내용을 돌에 새겨 놓은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제1조에는 ‘노부세를 현장에서 잡았을 때는 준 자나 받은 자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노부세와 관련하여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동일한 처벌이 적용된다는 것을 국제법적으로 명문화한 것을 의미하였다.

결국 노부세는 최초 왜관에 접촉이 있던 조선의 관리와 상인들 사이에 밀무역의 용어로 등장한 것이 그 행위의 성행과 함께 확대되어 이윽고 특수한 경제용어의 하나로서 정착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밀무역과 노부세

노부세는 왜관의 개시대청에서 정상적인 개시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채무가 아니라 조선 상인들이 흩어져 각방(各房)에 들어가 감독의 눈을 피하여 왜인과 불법적인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채였다. 노부세는 왜인이 쌀과 같이 왜관내 거래가 제한된 밀무역품의 납입을 전제로 혹은 그것을 독촉하기 위한 목적을 조선의 밀무역자에게 밀무역을 위한 자본은 미리 대주는 것으로 밀무역의 필수 수단이었다. 동래부사어진익(魚震翼)이 비변사에 보낸 관문(官文) 중 왜채에 대한 조선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는데, 당시 조선인이 왜인에게 빚진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이 빚을 추궁당하게 되거나 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조정에까지 미치게 될 여파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전대로 부채가 가장 많은 자를 효시에 처하고 앞으로 각별한 조사와 적발을 통하여 엄중히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17세기 중반 왜채, 즉 노부세의 총 미상환 액수는 대략 100,000여 냥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측의 상환 독촉에도 불구하고 상환 액수는 전체의 2~3할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노부세의 문제는 조선 측뿐만 아니라 대마도 측에서 보더라도 대부 액수가 많아지고 미상환 액수가 늘어날수록 번(藩)의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왜채의 징수를 독촉하는 과정에서 양국인간에 살인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변례집요(邊例集要)』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田代和生, 『倭館-鎖國時代の日本人町』, 文春新書 281, 2002.
  • 김동철, 「17세기 일본과의 교역·교역품에 관한 연구-밀무역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61,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장순순, 「조선후기 倭館에서 발생한 朝日 양국인의 물리적 마찰 실태와 처리」, 『한국민족문화』 13,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1999.
  • 長正統, 『路浮稅考-肅宗朝癸亥約條の一考察」, 『朝鮮學報』 58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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