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金時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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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4년(명종 9)∼1592년(선조 25) = 39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무신. 진주목사(晋州牧使) 등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자는 면오(勉吾)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목천(木川)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고, 어머니는 창평 이씨(昌平李氏)이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김석(金錫)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종사랑(從仕郞)김언묵(金彦黙)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대첩(晉州大捷)>에서 3,800여 명의 병력으로 왜장 하세가와 히데이치[長谷川秀一]가 이끄는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치고 순찰하다가 적탄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54년(명종 9) 충청도 목천현(木川縣) 백전촌(柏田村)에서 태어났다. 무과(武科)에 여러 번 낙방한 끝에 음서(蔭敍)로 나가, 1578년(선조 11) 군기시(軍器寺)직장(直長)과 군기시 주부(主簿)를 역임하고, 1581년(선조 14)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었다. 그러나 흉년에 기민(饑民)을 제대로 구휼(救恤)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선조실록』 14년 4월 5일)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함경도도순찰사(咸鏡道都巡察使)정언신(鄭彦信)부장(部將)으로 출정해서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에 공을 세웠다.

31세가 되던 1584년(선조 17) 별시(別試) 무과에 응시하여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이어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으로서 병조 판서(判書)에게 병기 수선과 군사 훈련에 대하여 건의하였다가 거부당하자 사직하였다. 그 뒤에 군기시 판관(判官)에 임명되었는데, 제조(提調)이헌국(李憲國)이 그의 뛰어난 기량을 알고, 외직(外職)에 보임될 때마다 비변사(備邊司)에 간청하여 김시민을 군기시 판관으로 유임시켰다. 1591년(선조 24) 조헌(趙憲)이 왜적을 방어하는 대책을 상소하면서, 김시민과 조웅(趙熊) 등 10여 명을 왕에게 천거하였는데, 당시 별로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지는 않았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8 「김시민(金時敏)」 이하 「김시민시장」으로 약칭]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晉州判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진주목사이던 이경(李璥)을 따라 지리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이경이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김성일(金誠一)은 김시민에게 진주목사의 직책을 대리하도록 명하였다. 임시로 진주목사를 맡은 김시민은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며 피난 갔던 진주성의 백성들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계를 수리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다시 편성하여, 군사 체제를 정비하였다.[「김시민시장」]

이때 왜적은 전라도를 침략하고자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였다. 진주목사 대리 김시민은 사천현감(泗川縣監)정득열(鄭得悅)과 함께 왜적을 방어하였는데, 곤양군수(昆陽郡守)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이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그 결과 왜적을 격파할 수 있었고, 도망치는 왜적을 추격한 끝에 십수교(十水橋)에서 승리를 거두며 사천·고성·진해 등의 여러 성을 회복하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 또 경상도 의병장 김면(金沔)의 구원을 요청 받고, 김시민은 정병 1천여 명을 이끌고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으로 가서 김면의 의병과 함께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여러 차례의 전공이 비변사에 보고되자, 그해 8월 1일 조정에서는 김시민을 진주목사로 임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 정식으로 진주목사가 되자마자, 김시민은 일본의 대포 제조 방식을 모방하여 염초(焰硝) 5백여 근과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대포의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였다. 그해 9월 진주목사김시민은 군사를 이끌고 진해로 가서 왜적을 물리치고 적장 타이라 쇼우토[平小太]를 잡아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보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임명하였다.(『선조실록』 25년 10월 6일),(『선조수정실록』 25년 10월 1일)

진주는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있는 곳이었다. 이에 적장 하세가와 히데이치 등은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를 침입하였는데, 그해 10월 5일 왜적의 선봉 부대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나타났고, 다음날인 10월 6일부터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진주목사김시민은 성안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시켜 군사의 숫자를 과시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서 허비하지 말도록 주의하며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진주성 안에는 김시민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이광악이 이끄는 군사 100여 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때 의병장 곽재우와 최경회(崔慶會) 등이 의병을 이끌고 와서 왜군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진주성 싸움은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6일부터 본격적으로 진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해왔는데 7일과 8일에는 종일 성안을 향하여 총탄과 화살을 난사하였다. 10일 새벽 총공세에 나선 왜군들은 긴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벽을 기어오르고, 땅굴을 판 후 조총을 쏘면서 돌진해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진주성 안에서는 김시민의 지휘에 따라 활과 대포를 쏘고, 불에 달군 쇠붙이와 끓는 물을 성 아래로 퍼붓는 동시에 짚에 불을 붙여 땅굴에 던지기도 하는 등 사력을 다해 싸워 마침내 왜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것이 <제 1차 진주성 전투>이다.

마지막 날 왜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물리친 다음, 진주목사김시민은 성안을 순찰하던 중에 쓰러진 왜군이 쏜 탄환에 이마를 맞아 들것에 실려 관사로 돌아왔다. 김시민은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나랏일을 걱정하고, 때때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위독해져 10월 18일 진주의 관사에서 8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39세였다. 김시민의 진주대첩은 이순신(李舜臣)의 <노량대첩>, 권율(權慄)의 <행주산성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크게 승리를 거둔 3대 대첩의 하나이다. 이때 진주성을 공격하던 왜군의 피해는 막대하여, 전라도 지방을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593년(선조 26)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명(明)나라 심유경(沈惟敬)과 강화 교섭을 시작할 때 강화 회담의 선결 조건으로 “진주성의 싸움에서 우리 장교[將官]로서 죽은 자가 3백 명이고, 군병으로서 죽은 자가 3만 명이므로, 반드시 상당한 대가를 보상해 주어야 화해를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다소 숫자의 과장은 있지만,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이 심각한 치명타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화조약이 성립되자, 철수하던 왜군들이 진주성으로 총집결하여 1593년(선조 26) 6월 <제 2차 진주성 전투>를 벌여 진주성 주민 6만여 명을 모조리 죽인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특명에 따른 앙갚음이었다.(『선조수정실록』 26년 6월 1일)

성품과 일화

성품이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남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활을 쏘는 데에 천재적 자질이 있었다.[「김시민시장」] 김시민의 고향 목천 백전촌 근처 큰 냇가에는 바위가 웅덩이를 만든 곳에 큰 구렁이[大蛇]가 그 가운데에 굴을 파고 살았는데, 벽전 마을 사람들이 기르던 가축들이 물 가까이 가면 구렁이가 나타나서 잡아먹었다. 김시민은 구렁이를 잡으려고 뽕나무와 쑥대로 손수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냇가로 갔는데, 동네 친구들에게 먼저 바위에 올라가서 구렁이를 유인하도록 하였으나 아이들은 두려움에 감히 올라가지 못하였다. 그때 김시민이 활을 당겨 동네 친구들을 쏘려는 것처럼 시늉하자, 아이들이 겁을 먹고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이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고 물결이 용솟음치며 정말로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뛰쳐나와 바위를 휘감고 입을 사납게 벌린 채 아이들을 잡아먹으려고 덤볐다. 어린 김시민이 얼른 뛰쳐나가 마구 화살을 쏘아대자, 그 구렁이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였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크게 놀라며 김시민에게 아주 씩씩하다고 칭찬하였다. 이후 백전촌 사람들은 그곳을 가리켜 ‘김시민이 구렁이를 쏜 곳[金公射蛇處]’이라고 하였다.[「김시민시장」]

김시민이 진주판관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미 그의 숙부인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김제갑(金悌甲)이 진주목사를 맡아 뛰어나게 잘 다스렸으므로, 김시민이 진주판관으로 부임하자 진주 사람들은 “저 사람이 김 사또의 조카이다”라고 하며 기뻐하였다. 김시민도 삼촌 김제갑의 뒤를 이어 선정을 베풀자,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이듬해 김시민이 진주목사가 되고, 진주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원주목사(原州牧使)였던 숙부 김제갑이 영원산성(鴒原山城)의 전투에서 순절했다는 부고가 왔으므로, 그가 거애(擧哀)하자 온 성안 사람들이 모두 친척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고 통곡하였다. 왜적의 첩자가 염탐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 왜장(倭將)에게 보고하기를, “주장(主將)이 이처럼 인심을 얻었으니, 진주성을 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김시민시장」]

그 뒤에 김시민의 조카 현감김유(金維)가 진주 지방을 지나다가, 어느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나이 많은 집주인과 통성명을 하다가, 늙은 집주인이 김유가 김시민의 조카임을 알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김유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집주인은 김유에게 더 머물기를 청하고 소를 잡아서 대접하며 말하기를, “김 사또의 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옛날 지인(知印)의 자리에 있으면서 김시민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왜적과 싸웠다고 말하였다. 이어 그때 왜적과 싸웠던 일을 김유에게 자세히 전해 주었으므로, 진주대첩의 전말이 이유(李濡)의 시장(諡狀)을 통하여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게 되었다.[「김시민시장」]

김시민은 활을 잘 쏘는 명궁이었다. 그 집주인이 증언하기를, “왜적과 싸울 때 지인 두 사람이 그의 양쪽 옆에 붙어 서서 화살을 바로바로 공급하여 주어도 얼마나 재빨리 화살을 쏘는지, 오히려 화살이 부족하였습니다. 오래 쏘다가 손가락 무지(拇指)의 힘이 떨어지면 식지(食指)·장지(長指)를 써서 활을 쏘았지만, 그래도 오히려 쏘면 반드시 연달아 명중하였습니다. 세 손가락이 모두 병이 나면, 그때서야 화살을 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김시민시장」]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무이다. 묘소는 처음에 충청북도 괴산의 선영에 있었으나, 그 뒤에 충주(忠州)의 신당리(新塘里) 건지산(乾支山)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진주대첩 때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왜적이 이를 알까봐 두려워하여 비밀로 하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상을 치렀다. 반장하다가,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임명장을 받았다.[「김시민시장」]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훈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경상도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와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없어지자, 그 신주를 창열사(彰烈祠)에 모셨다.

부인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서팽수(徐彭壽)의 딸인데, 남편보다 23년을 더 살다가 남편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부부 사이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그의 형인 김시회(金時晦)의 아들 김치(金緻)를 양자로 삼았다. 김치는 문과에 급제하고 관찰사를 지냈으며, 참판목첨(睦詹)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을 김득신(金得臣)을 두었다. 안풍군(安豐君)김득신은 문장이 뛰어났으므로, 이식(李植)으로부터 “시문이 당세의 제일이다”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김시민시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백사집(白沙集)』
  • 『서애집(西厓集)』
  • 『우복집(愚伏集)』
  • 『우계집(牛溪集)』
  • 『해좌집(海左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