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독(勸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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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던 세손강서원 소속의 종5품 관직.

개설

조선시대 세손의 교육과 관련하여 권독(勸讀)은 영조 때 처음 등장하였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의소세손을 위해 강서원을 설치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세손사(世孫師)와 세손부(世孫傅)를 두었다. 세손의 교육을 강화하고 아울러 강서원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후 영조는 1759년에 당시의 세손 정조를 위해 강서원을 설치하면서 태종 때의 고사를 원용하여 좌·우유선(左·右諭善)을 더 두었다. 좌유선에는 김양택(金陽澤), 우유선에는 서지수(徐志修)를 임명하였다. 영조는 좌·우유선의 품계를 정3품에서 종2품까지로 하였다. 이에 따라 세손강서원은 기왕의 종4품 익선(翊善)을 수반으로 하던 아문에서 정3품 유선을 수반으로 하는 아문으로 격상되었다. 아울러 영조는 좌·우유선과 함께 좌·우권독(左·右勸讀)을 가설하고 좌권독에 김원행(金元行), 우권독에 송명흠(宋明欽)을 임명하였다. 권독의 선발 기준은 ‘학문과 덕행으로 선비들의 모범이 되는 학자’였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재야의 산림(山林)을 세자시강원의 찬선(贊善), 진선(進善), 자의(諮議) 등 보도직(保導職)으로 끌어들이려던 관행의 연장이었다. 이때 설치된 좌·우권독이 그대로 『속대전』에 실렸는데, 『속대전』에서는 좌권독과 우권독의 품계가 종5품이었다.

담당 직무

권독은 ‘독서를 권장한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세손 교육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유교적인 왕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유교 제왕학의 목표는 이른바 『대학』의 8조목(條目)에 압축되어 있는데, 8조목의 궁극적 목표는 ‘지극한 선(善)에 머문다’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었다. 즉 유교 제왕학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선한 본성을 적극 개발·육성하여 작게는 개인의 선을 완성하고 크게는 천하의 선을 완성하는 데 그 목표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세손은 장차 왕이 될 신분이므로 세손의 제왕 교육 목표 역시 세손 개인의 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선까지도 개발·육성할 수 있는 데 있었다. 따라서 학문과 덕행으로 선비들의 모범이 되는 학자를 권독으로 선발하였다. 권독은 세손의 학문과 품성 연마에 필요한 독서를 권장하여 어린 세손의 선에 대한 학문적 기초와 실천적 토대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변천

갑오개혁 때 세손시강원과 보양청은 모두 시강원에 통합되었다. 따라서 갑오개혁 때에 권독은 공식적으로는 세자시강원에 소속된 관원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1903년(광무 7) 황태손강서원(皇太孫講書院)이 설치됨으로써 강서원은 시강원에서 독립하였다. 이는 황제 체제에 맞추어 조선시대의 세손시강원을 격상시켜 독립시킨 것이었다. 황태손강서원에서는 권독이란 직명이 사라지고 그 대신 일강관(日講官) 2명, 유덕(諭德)과 부유덕(副諭德) 각 1명, 찬독(贊讀) 2명이 배속되었다. 이에 따라 권독은 공식적으로 1903년 황태손강서원이 설치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강학청일기(講學廳日記)』
  • 『강서원일록(講書院日錄)』
  • 『열성진강책목록(列聖進講冊目錄)』
  • 『정조강서원일기(正祖講書院日記)』
  • 『시강원지(侍講院志)』
  • 『열성조계강책자차제(列聖朝繼講冊子次第)』
  • 『서도(강학일기)(書徒(講學日記))』
  • 육수화, 『조선시대 왕실교육』, 민속원, 2008.
  • 이기순, 「인조조의 ‘반정공신’ 세력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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