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길(權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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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0년(명종5)∼1592년(선조25) = 43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응선(應善)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활동

음보로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재직하던 중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동래(東萊)를 함락한 왜적은 길을 나누어 진군하였는데,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기병(騎兵)은 북상하여 상주(尙州)를 침입하였다. 조정에서는 순변사(巡邊使)이일(李鎰)을 파견하여 왜적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마침 칠진(漆津)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패배하여 돌아온 상주목사(尙州牧使)김해(金澥)가 성 밖으로 나가서 이일을 영접하려고 하니, 상주판관권길이 성난 얼굴로, “대군(大軍)이 패배하여 인심(人心)이 동요하고 있는데, 공은 이것을 진정시키지 않은 채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신다는 말입니까?”라고 만류하였다.

그런데, 이일이 서울에서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상주에서 ‘제승방략(制勝方略)’의 3군 체제를 구축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각지에서 상주에 보내온 군대도 미약한 상태였다. 자성(子城) 밖 시내의 북쪽 언덕에서 황급히 진을 꾸려서 왜적과 싸우게 되었는데, 결국 전군(全軍)이 참패하고 말았다. 북방에서 오랑캐를 물리친 명장 이일을 중심으로 하는 선봉 주력 부대가 내륙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벌인 것이기 때문에 이 싸움에 선조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주력부대라고 하여도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왜적의 급습을 받자 대장 이일은 전장을 탈출하여 충주의 신립(申砬)에게로 도망갔다. 이런 가운데, 권길은 혼자 우뚝 서서 동요하지 않고 왜적과 싸우다가 힘이 다하자 깃발 아래에서 죽었다. 이때 호장(戶長)박걸(朴傑)이 “우리 권후(權侯: 권길)가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데, 우리들이 권후를 배반한단 말인가?”라고 말하고 뒤따라 죽었고, 노복과 군졸들도 많이 따라 죽었다.

사후 추모와 유적

이준(李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창석집(蒼石集)』 권16) 조정에서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였다. 1825년(순조25) 상주의 유생(儒生)들이 충렬사(忠烈祠)를 세우고, 권길과 박걸 등을 제향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징비록(懲毖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창석집(蒼石集)』
  • 『검간집(黔澗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