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극화(權克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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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 태종~세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용부(庸夫)이고, 호는 습재(習齋)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우사간(右司諫)권참(權參)의 아들이고, 참찬(參贊)권감(權瑊)의 아버지이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14년(태종14) 정시(庭試) 문과에 합격하여, 1418년(태종18)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422년(세종4) 성균관 직강(直講)에 있을 때, 전라도 나주(羅州) 팔흠도(八歆島)의 바다 속에 잠겨 있는 침향(沈香)을 채취할 것을 건의하였다. 1430년(세종12) 전라도 낙안군사(樂安郡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1431년(세종13)에는 소윤(小尹)으로서 사인(舍人)조서강(趙瑞康)과 함께 『대명률(大明律)』을 이두로 번역하고 풀이하였다. 이때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한 것이 세종의 한글 창제의 동기가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세종 중기에 사간원(司諫院)지사(知事) ·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또 예조 참의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서 나주목사(羅州牧使)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후기에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경주부윤(慶州府尹)과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46년(세종28)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기민(飢民) 구제를 소홀히 하였다고 탄핵당하여 전라도 장성(長城)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문종~단종 시대 활동

1450년(문종즉위) 충청도관찰사로서 상서(上書)하여, 세종 시대 제정된 연분 9등(年分九等) · 전분 6등(田分六等)의 공법(貢法)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같은 해 형조 참판에 발탁되었으며, 그 뒤에 중추원 부사(副使) 에 전임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황해도관찰사를 다시 역임하였다. 1452년(단종즉위) 중추원 첨지사를 거쳐, 다음해에 다시 중추원 부사에 전임되었다.

사후의 추모와 유적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언주리(彦州里) 청담(淸潭)에 있으며, 8대손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31) 영의정에 추증되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으로 이름났는데, 삼화(三和) · 밀양(密陽) · 안동(安東) · 무안(務安) · 음성(陰城)의 고을에 게시한 현판에 다수의 시가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필원잡기(筆苑雜記)』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