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린(交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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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일본 및 유구, 여진에 대한 외교정책.

개설

책봉(冊封) 체제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주변국 간의 관계를 사대조공(事大朝貢)이라는 의례를 통하여 상호 공존하자는 국제 질서였다. 본래 책봉 체제는 한대(漢代)에 이르러 황제와 제후 간에 형성된 국내의 질서를 국제 관계에 확대 적용한 것이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의 교린(交隣) 관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 구체적인 형태로는 책봉 체제를 바탕으로 하면서 형성되었다. 조선초기의 대외 정책은 유교적 세계관인 화이관(華夷觀)에 바탕을 두면서 사대교린으로 구체화하였다. 명에 대해서는 사대로, 주변국에 대해서는 교린으로 평화적인 대외 관계를 보장받고자 한 것이었다.

교린의 외교 의례적 개념은 ‘적국항례(敵國抗禮)’로서 필적하는 나라끼리 대등한 의례를 나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교린국이란 대등한 외교 의례를 나누는 국가라는 뜻이었다. 조선초기 교린의 대상으로는 일본·유구·여진·동남아시아 국가가 있었다. 이 중에서도 책봉 체제에 편입되어 적례(敵禮)의 대상이 된 것은 일본의 실정막부(室町幕府) 장군과 유구국왕(琉球國王)이었다.

조선은 1404년(태종 4) 일본에 대하여 같은 책봉국이라는 입장에서 대등한 교린국으로 국교를 재개하였다. 조선 왕은 일본 국왕인 막부 장군과 적례교린을 맺었다. 유구국 중산왕(中山王) 사절이 1392년(태조 1)부터 신하라 칭하면서 표문(表文)을 바치는 등 내조(來朝)하였지만, 유구를 교린국으로 상대한 것은 1429년(세종 11) 삼산시대(三山時代)를 마감하고 유구 본도를 통일한 상파지(尙巴志)가 보낸 1431년(세종 13)의 사절단부터였다.

한편 조선초기의 여진은 분열된 상태여서 명의 책봉 체제에도 가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선 왕의 상대역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대등한 교린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국경을 접하고 있는 세력이었던 만큼 조선은 여진에 대한 정책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조선의 여진 정책을 보면 대일 정책과 형태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많다. 예컨대 서울에 북평관(北平館)과 동평관(東平館)을 각각 설치해 사절을 접대하고 교역을 허락하였으며, 1406년(태종 6)과 1407년(태종 7)에 무역소(貿易所)와 왜관(倭館)을 각각 설치하여 국경 지역에서 교역할 길을 열어 주었다. 조선의 대여진 정책과 대일 정책은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교린이란 매우 포괄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으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용된 용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사용된 교린의 의미를 정리해 보면, 교린은 유교적 실천 규범으로서 신의라는 도덕규범을 동반한 외교 행위를 의미하였다.

‘교린의 예(禮)’, ‘교린의 도리’는 상대국의 길흉사에 대하여 사절[慶弔使]을 보내 표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교린의 도리는 구체적으로 믿음[信], 의리[義], 도리[道]로 표현되었고, 이 유교적 규범이 최종적으로 예로 귀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교린 외교는 신의·의리·도리라는 유교적 가치 기준을 가지고 예에 합당한 사절의 왕래를 의미하였으며, 재화나 무역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런데 교린이란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는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였다. 이 시기의 교린은 ‘열국(列國) 간의 교빙(交聘)’을 의미하였는데 나름대로의 국제법적인 이념과 정책이 구비되어 있었다. 단지 이것은 중화(中華) 지역에 한정되는 것으로 이적(夷狄)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교린은 춘추시대의 교린을 모델로 하면서도 조금 더 유교적인 가치 기준을 중시한 점이 특징이었다. 또 명대의 책봉 체제가 중국 중심의 일원적 세계관의 표현이라면 ‘춘추적 교린’은 다원적이고 다극적(多極的)인 세계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 교린의 대상으로는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일본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런데 조선초기 일본의 실정막부와 대등한 교린 관계를 체결하였지만, 세종대에 이르러 막부가 왜구를 금제하지 못하고 전국의 영주들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막부를 대상으로 한 외교와 함께 대마도주와 서국 지역의 유력한 영주들과도 별도의 통교와 교역을 허락하였다.

조선시대의 대일 관계는 중앙정부 간의 일원적인 관계만 아니라 여타의 다양한 세력들과도 교류하는 다원적인 관계였다. 또 전자의 중앙정부 간의 관계는 대등한 외교 의례를 갖춘 적례교린(敵禮交隣)이고, 후자는 조공적 의례를 갖추게 하는 기미교린(羈縻交隣)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조일 통교 체제는 다원적이면서도 중층적(重層的)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건국 이래 많은 과정을 거쳐 성종대 초기에 확립된 대일 통교 체제의 구조와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초기 일본과의 교섭은 명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전개되었지만 태종대부터는 명 중심의 책봉 체제에 같이 편입되면서 교린국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왕과 일본의 실정막부 장군인 일본 국왕은 대등한 자격으로 수호하고 사절을 교환하였는데 이를 적례교린이라고 하였다.

둘째, 조선 정부는 실정막부와의 일원적인 통교만이 아니라 막부의 관령(管領)·수호대명(守護大名)·서국 지역의 호족·대마도주·수직인(受職人)·수도서인(受圖書人) 등 다양한 세력들과 통교 관계를 가졌다. 이른바 다원적인 통교 체제를 취하였는데, 이들과의 통교 형태는 조공 무역이었다. 이를 기미교린이라고 하였다. 일본 측 통교자들의 목적은 교역을 하는 것이었지만 조선 정부는 모두 기미질서(羈縻秩序) 속에서의 외교 의례와 조공 무역의 형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해동제국기』「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에 의하면 일본국왕사 이외의 모든 통교자들은 사송선(使送船)의 형식을 취해야만 하였다. 그들은 도서(圖書)가 찍힌 서계와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지참해야 했고, 포소에 도착한 후에는 조선 왕에 숙배(肅拜)를 하도록 하였다. 서울까지 올라오는 거추사(巨酋使)의 경우 지정된 도로를 통하여 상경하여 왕에게 숙배하고 토산품을 진상하는 조공 의례를 행한 후 회사품을 받아가는 의식을 하도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정치적 복속 대신 경제적 보상을 통하여 평화적인 대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중국의 조빙사대(朝聘事大)와 같은 방식이었다.

셋째,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매개로 하여 기미교린 관계에 있는 일본의 여러 통교자들을 통제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 이후 일본의 정세를 파악한 세종은 조선 조정에 순응하는 대마도주의 입장을 옹호해 주면서 도항왜인에 대한 관리자로서의 위치를 세워 주었다. 1419년의 서계에 관한 약조, 1438년(세종 20)의 문인제도 정약, 1441년(세종 23)의 고초도조어금약, 1443년(세종 25)의 계해약조 체결 등을 통하여 대마도주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함으로써 대일 외교 체제를 정비하였다.

넷째, 이러한 조선 정부의 노력에 의하여 조일 통교 체제는 중앙정부끼리의 적례관계 교린과 대마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타 세력과의 기미관계 교린이라는 중층적 관계로 정비되어 갔다. 계해약조 이후 조선의 대일 교린 정책은 실정막부와의 적례교린과 대마도주와의 기미교린이라는 이원 체제로 통합 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의도와 달리 일본에서는 계속 다양한 세력들이 사절을 파견해 왔기 때문에 조선전기까지는 다원적인 통교 형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정권을 장악한 덕천막부(德川幕府)가 지방 세력을 완벽하게 통제하였고 대마도에 대한 감독권을 확보함으로써, 조일 통교 체제는 막부와는 적례교린, 대마도와는 기미교린이라는 체제로 확립되었다. 조일간의 통교 체제의 구조와 변화는 주로 일본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하는 바가 컸지만 조선후기에 확립된 일원화된 체제는 계해약조 이후 조선 조정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였다.

의의

조선초기에 확립된 세계 인식의 기본 틀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화이관이었다. 그런데 화이관은 문화 이념이고, 그에 바탕을 둔 사대 조공 체제는 국제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대외 정책의 기본인 사대교린 정책은 화이관이라는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당시의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평화적인 대외 관계를 지켜 나가고자 한 고뇌의 산물이었다. 조선전기의 사대교린 정책은 당시의 국내적·국제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현실성과 실용성·자주성을 지닌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대교린 정책은 국가 안보를 외교적 방략에만 치중하고 중국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한계성이 있었다. 평화에 안주하면서 국방을 소홀히 한 결과 16세기 말과 17세기 초반에 일본과 여진족으로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였다. 또 19세기에는 중화주의적 국제 질서가 붕괴되어 가는 상황에서도 기존의 사대교린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새로운 국제 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독자적 진로 설정에 실패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고사촬요(攷事撮要)』
  • 『통문관지(通文館志)』
  • 『춘관지(春官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지성의 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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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해종, 「조선전기 한중관계의 몇 가지 특징적인 문제」, 『동양학』 14,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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