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영정(功臣影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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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의 초상화.

개설

공신영정(功臣影幀)은 나라와 왕실에 공이 있는 인물들에게 공신호(功臣號)를 내려주면서 상훈(賞勳)의 하나로 수여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공신에게는 작위와 함께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고, 지위를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이러한 공신의 권위를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 교서(敎書)와 공신영정이며 영정은 인물의 형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귀감을 주는 감계적(鑑戒的) 의미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시작으로 28종에 이르는 공신 칭호가 수여되었으며 그때마다 공신영정이 제작되었다. 공신영정은 왕명에 의해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 시기 가장 명망 있는 화가가 참여하여 최고의 수준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제작 시기가 정확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작품들의 편년 구성에 기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연원

공신 초상화의 제작은 중국전한(前漢) 선제(宣帝)가 기원전 51년에 궁전의 기린각(麒麟閣) 좌우에 대신상 11폭을 그리고 그 옆에 그들의 관직과 성(姓)를 기록한 것에서 연유한다. 또 후한(後漢) 명제(明帝)는 59년에 나라를 중흥시킨 명신을 추모하는 건무명신열장(建武名臣列將) 28인을 낙양 남궁운대(南宮雲臺)에 그렸다고 한다.

당(唐) 태종(太宗)은 643년 2월에 화가 염립본(閻立本)에게 개국공신 24명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는데 그가 그린 초상화는 장안궁에서 가장 화려한 누각인 능연각(凌煙閣)에 있었으며 이는 조선시대까지 공신상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공신영정이 제작된 사실이 확인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사』에는 태조가 신흥사(新興寺)에 공신당(功臣堂)을 두고 벽에 삼한공신(三韓功臣)을 그렸다고 한다. 또한 1262년에 미륵당 공신당의 경영을 다시 언급하면서 태조 때부터 공신들을 모두 벽에 그려 매해 10월이면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나와 고려시대는 개국 초기부터 공신상 제작이 활발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공신상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회화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초상조각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제작 및 보관

조선은 개국 직후 3차례의 공신 책봉을 시작으로 영조대 분무공신을 끝으로 총 28회에 걸쳐 공신 녹훈이 있었다. 조선초기부터 중종대까지 공신의 포상 규정 중에는 ‘각(閣)을 세우고 모습을 그린다’는 입각도형(入閣圖形)이 있었으며 17세기 이후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한다’는 도형수후(圖形垂後)로 바뀌었다.

입각도형은 공신영정을 2본 제작하여 충훈부(忠勳府)에 1본을 봉안하고 1본은 공신의 집에 내려주는 것이다. 도형수후는 제작에 따른 비용 문제를 감안하여 1본만을 제작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공신의 집에 내려주었다. 따라서 후손들은 공신영정을 가문의 귀한 보물로 여기며 사당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훼손이 되었을 경우에는 이모본(移模本)을 제작하여 보존하였다.

공신영정의 제작은 충훈부와 공신도감(功臣都鑑)에서 담당하였다. 충훈부에서는 개국 초기에 당의 능연각 제도를 모방하여 장생전(長生殿)을 지어 공신영정을 봉안했는데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과 공신영정을 함께 봉안하는 방식을 택하려 하였으나 예조에서 주나라는 어진을 봉안하지 않았다는 전례(前例)를 들어 공신상만을 따로 봉안하는 제도가 채택되었다. 따라서 태조가 세운 장생전은 사훈각(思勳閣)으로 고친 뒤 훈신상(勳臣像)만을 봉안하였다.

이후 충훈부에서는 기공각(紀功閣)을 따로 지어 태조, 세조 등의 훈첩(勳帖)과 함께 공신영정 2본 중 1본을 보관하였다.

변천 및 특징

(1) 태조〜태종

조선 건국 직후 3차례 진행되었던 개국공신,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을 합하여 삼공신(三功臣)이라 불렀다. 이들의 초상화는 고려시대의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의 초상화와 공통된 양식적 특징을 보이며 고려말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개국공신은 개국 한 달 뒤인 1392년(태조 1) 8월에 배극렴(裵克廉) 외 44인이 공신으로 책봉된 것이며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은 정종과 태종 즉위와 관련된 왕자의 난을 평정한 인물들에게 책봉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이 시기 공신영정은 훼손으로 인해 후대에 제작된 이모본이지만 최초의 정본이 가지는 양식적 특징은 남아있다. 이제(李濟)는 개국공신으로 1735년(영조 11), 1798년(정조 22), 1865년(고종 2)에 그린 3점의 초상화가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제는 사모를 쓰고 소매가 좁은 단령 차림으로 새끼를 꼬아서 만든 승상(繩床)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두 손을 모아 마주 잡는 공수 자세를 하고 있으며 얼굴과 몸은 같은 방향을 향하였는데 조선초기 공신영정에서는 우향과 좌향의 형식이 함께 그려졌다. 영정에는 배경이 없으며 단령의 옆트임 등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도 이 시기 공신영정의 특징이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에 실렸던 좌명공신인 마천목(馬天牧)상도 같은 형식이다.

(2) 단종〜명종

15세기 중기에서 16세기 중기에 이르는 시기로 정난(靖難)·좌익(左翼)·적개(敵愾)·익대(翊戴)·좌리(佐理)·정국(靖國)공신이 책봉되었다. 좌익공신상으로 신숙주(申叔舟), 적개공신상으로 손소(孫昭)·장말손(張末孫)·오자치(吳自治), 정국공신상으로는 홍경주(洪景舟)·이우(李瑀) 등의 공신영정이 전한다.

신숙주상은 1454년(단종 2) 흉배 제도를 제정한 후 흉배가 그려진 첫 초상화이다. 이 시기 공신영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적개공신상부터는 초상화를 그리기 가장 좋은 시점인 신체는 8분면(分面)이지만 얼굴은 7분면을 그리고 있다. 적개공신에서부터 나타나는 7분면 시점은 이후 조선중기 이후 초상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평행 투시법으로 그린 족좌대(足座臺), 빳빳하게 풀 먹인 듯 표현된 단령, 단령 옆트임의 장식적인 부분을 강조하였으며 옷 주름을 각지게 표현한 것 등이 특징이다.

중종반정으로 녹훈된 정국공신상에는 배경에 진채(眞彩)로 처리된 바닥 깔개인 채전(彩氈)이 등장한다. 또한 옷의 윤곽선이 부드러워지면서 질감을 표시하는 주름 처리는 각지게 표현되는데 이와 같은 기법은 17세기 이후 제작된 공신영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3) 선조〜인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기에 걸쳐 1590년(선조 23) 광국(光國)·평난(平難)공신 책봉을 시작으로 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위성(衛聖)·익사(翼社)·정운(定運)·형난(亨難)·정사(靖社)·진무(振武)공신이 책봉되었다.

공신영정의 전형이 확립된 시기로 좌안 7분면의 좌상을 취하고 있으며 사모의 높이가 상당히 낮아졌는데 정사·진무공신상의 경우 더 낮다. 옷 주름은 굵고 검은 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음영을 하지 않은 채 선으로 처리하였으며 채전을 높게 그렸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의 공신인 정사공신상은 이전과 달리 하나의 형식이 아닌 2가지 형식으로 그려졌다. 공신영정은 원래 동일한 형태와 규격[同形同規]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 시기 2가지 형식의 공신영정이 나오게 된 것은 영정 제작에 참여하는 화가군들이 이원화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광국·익사·형난공신인 이산해(李山海), 호성공신 정탁(鄭琢), 정사공신 박정(朴炡)의 공신영정 등이 대표적이다.

(4) 숙종〜영조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보사(保社), 부사(扶社), 분무(奮武) 등 3차례에 걸쳐 공신 책봉이 있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공신영정에는 정면상을 취한 것부터 8~9분면에 이르는 다양한 자세가 나타나며 오사모(烏紗帽)에 흉배와 대를 착용한 공복 차림이다. 채전과 돗자리가 사라지는 대신 의자 위에 호피(虎皮)를 깔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보사공신 김석주(金錫冑)상은 공신영정 중에서 정면상으로 그려졌으며 분무공신 오명항(吳命恒)상은 족좌대 윗면에 화문석을 깔고 교의에 표피가 걸쳐있는 형태가 18세기 전반기 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돌베개, 2009.
  • 윤진영, 「조선시대 공신화상(功臣畵像)」의 신례(新例), 『조선의 공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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