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工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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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닦고 이치를 궁구하며 인격과 학문을 드높이는 길.

개설

공부라는 말의 의미는 다양하다. ‘공부(功夫)’는 ‘공부(工夫)’와 같은 의미로 여겨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의 뜻으로 풀이하지만, 일반적으로 ‘공부’라 함은 글의 내용을 이해하고 나아가 기억하여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그 뜻을 세분하면 ① 노력, 수고, ② 배우거나 닦음, 힘써 수행하거나 수양함, 생각을 집중함, ③ 여가, 겨를, 짬, 틈 등으로 표현된다.

조선시대 명종이 신하들에게 "공부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자, 의정부 참찬관(參贊官)조원수(趙元秀)는 "공(工)은 여공(女工)의 ‘공’이고 부(夫)는 농부(農夫)의 ‘부’이니, 사람이 학문할 적에 여공이 부지런히 길쌈하는 듯 해야 하고 농부가 힘써 씨 뿌리고 거두는 듯 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일에 대한 노력의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보면, 공부(功夫)와 공부(工夫)는 한자가 다르지만 서로 통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부(功夫)’는 마음에 대한 수양(修養)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수양에는 객관적 학문을 추구하는 면이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면적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극진히 하여 보존하는 면도 있다. 이 양면성은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공부는 성리학적 심성 공부의 한 측면으로 이해되었다. 심성 공부로는 마음을 다하는 진심(盡心), 마음을 바루는 정심(正心), 바른 마음을 보존하는 존심(存心) 등이 있으나 모두 궁극적으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없애는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서 ‘공부(功夫)’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이 문신들을 직접 시험하는 자리에서였다(『태종실록』 7년 4월 18일). 태종은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해준 심법(心法)에서 정일(精一)과 집중(執中)이 있는데 여기서 ‘정(精)’이니 ‘일(一)’이니 하는 것은 그 공부가 어떻게 다른지를 질문했는데, 여기에서 ‘공부’는 마음을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하는 내면적 측면의 수양으로 이해되었다.

세조대에는 세자(世子)가 왕이 되지 않았을 때의 공부가 언급되었다. 세자의 공부는 책을 끝마치는 것으로 보아,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읽어 문의에 해박하기보다는 『논어(論語)』의 원문을 읽어 마음의 실상을 따르는 것이라 하면서 "의리(義理)는 즐겨 문자 위에서 찾고 공부는 다만 존심(存心)을 기르는 데 있도다. 믿음은 하늘에도 통하고 아울러 땅에도 통하며, 공경(恭敬)은 모름지기 처음도 이루고 마지막도 이루리라. 이 두 글자야말로 천하(天下)의 치도(治道)에 이르리니, 하물며 지금 베푸신 말씀 다시 밝디 밝음에랴!"라고 하였다(『세조실록』 10년 4월 22일). 선비가 공부하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지만 그 공부는 곧 다복(多福)을 구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0년 7월 27일).

중종대에는 내면 수양으로서의 공부가 강조되었다. 공부나 학문이 진실하지 못하면 일을 처리하다가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정심공부(正心功夫)가 필요함을 말한다. 사람에게 실수가 있다 해도 그 허물을 고치면 훌륭한 것이니 앞으로는 과감하게 허물을 고치고 정심공부에 순실하게 힘써 광명정대한 마음을 세우는 것이다(『중종실록』 12년 7월 4일).

숙종대에는 자연의 재이(災異) 현상이 일어났을 때 왕은 자신을 반성하고 수양해야 화(禍)가 복(福)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1702년(숙종 28년)에 큰 홍수가 들자 부제학(副提學)김진규(金鎭圭)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전하께서 몸을 삼가고 마음에 두고 잊지 않는 공부를 더하시면, 좋지 않은 모든 기운이 물러가고 제왕의 밝은 덕이 빛나게 되어서, 요순(堯舜) 시대처럼 태평한 세상이 넓게 열려, 상제(上帝)와 귀신(鬼神)이 그 거센 위엄을 거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홍수(洪水)가 거의 다스려져서 평안하게 되고, 돌고 있던 심성(心星)이 물러가 아름다움을 같이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숙종이 너그러운 비답(批答)을 내리고,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숙종실록』 28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