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인(京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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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기 이후 조선시대에 중앙과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서울에 둔 지방 관청의 향리나 대리인.

개설

경주인(京主人)은 지방 군현의 서울 사무소인 경저(京邸)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경저주인(京邸主人), 경저리(京邸吏) 또는 줄여서 주인이라고도 불리며, 지방 관아가 서울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담당하였다. 한편 공물의 대납(代納)을 지방 출신 향리와 관계없는 사람이 대행할 경우에는 사주인(私主人)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경주인의 임무는 다양하였다. 중앙 각 관서에 사역하기 위해 지방에서 뽑아 보내는 선상노비(選上奴婢)의 입역(立役)과 상번(上番) 주선, 도망한 선상노비의 보충, 대동법(大同法) 실시 이전에는 공물의 상납과 그 읍의 부세 상납에 관한 주선, 자기 고장 지방민에게 잠자리와 식사 제공, 공무나 번상으로 서울에 올라오는 관리나 군인들이 각 관서에 배치되어 종사할 때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등 잡다한 일을 주선하고 서울의 각 관서와 지방간의 연락을 맡아서 하였다. 그 외에 신임·구임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도 하였다.

공물 대납의 과정에서 경주인은 중앙과 지방의 각종 세력과 결탁하여 먼저 공물을 대납하고 나중에 몇 배의 이자를 붙여 지방 관청에 요구하여 많은 이득을 보았다. 때문에 공납 의무자인 농민을 더욱 괴롭히는 폐단을 발생시켰는데, 이를 ‘방납(防納)의 폐단’이라 하였다.

경주인은 국가의 부세(賦稅) 징수 구조에 편승하여 경주인의 권한을 보장하는 특권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상업 활동에도 종사하였다. 그들의 상업 활동은 부등가(不等價) 교환에 의한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을 기반으로 소상품 생산자를 유통 구조에서 배제하는 도고(都庫) 활동이었다.

경주인 중에는 상업 자본을 기반으로 상인 물주가 되어 생산자를 선대제적(先貸制的)으로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평안도 강계의 경주인은 그 지방 특산품인 인삼에 대해 군문(軍門)과 결탁하여 수만 냥의 삼가(蔘價)를 미리 받아서 도고 활동을 하였고, 서울 상인이나 강계의 향소 및 수령과 결탁하여 인삼을 채취하는 삼호(蔘戶)에게 삼가를 미리 주어 생산자를 지배하였다.

개성의 경주인은 궁중에 납품하는 공물 종목에 황초립(黃草笠)을 넣고 계를 만들어 독점 납품하였고, 제주 경주인은 제주에서 생산되는 양태[涼臺]를 매점하여 전매하는 도고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경주인의 독점적인 도고 활동은 소상품 생산자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18세기 초 서울에서나 1862년(철종 13) 임술농민항쟁 때는 지방에서 경주인들을 습격하는 사건으로 경주인의 활동에 대한 반발이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관을 비롯하여 이속(吏屬)들이 경주인으로부터 빌려 쓴 돈이나 경저에 숙박한 비용은 빠른 시일 내에 갚아야 하는데 제때 갚지 못하여 경저의 부채, 즉 저채(邸債)를 지기도 하였다. 경저에서는 여기에 이자를 붙여 청구하였으므로 조선후기에는 각 지방 관청마다 4,000~5,000냥의 저채를 지게 되었다. 이를 갚기 위해서는 농민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세도 정치 때 백성들에게 각종 부과세를 징수하는 등 이서(吏胥)들의 부정·협잡이 자행되었다.

이에 대해 정약용(丁若鏞)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영주인(營主人)과 함께 경주인을 나라의 큰 폐단으로 규정하고, 경주인 역가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저리(邸吏)의 폐단은 향리보다 심하다. 내가 어릴 적에 경주인이라는 자를 보았는데, 모두 노예나 하천(下賤)으로서 무뢰하고 비천한 자였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이 기풍이 크게 무너져, 경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이 혹 8,000냥이나 되며 영주인의 자리는 1만 냥에 이르기도 한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경저와 영저는 모두 포악하고 간사한 자가 차지하고, 기름진 관청의 아전과 권세 있는 가문의 청지기로서, 비단옷에 얼굴이 깎은 옥 같은 자가 저리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경주인의 역가미가 오르는 이유를 첫째, 조정 양반들이 저리 자리를 사는 것이고, 둘째는 수령이 뇌물을 받는 것이며, 셋째는 감사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은 것이고, 넷째는 수령이 염문(廉問)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변천

경주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178년(고려 명종 8)에 만들어진 금산사(金山寺) 향로명(香爐銘)에 보이는 ‘경주인 낭장(郎將)김영후(金令侯)’라는 명문이다. 또 고려후기인 1345년(고려 충목왕 즉위) 이곡(李穀)이 쓴 금강산 장안사중흥비문(長安寺中興碑文)에 개성부에 장안사의 경저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경주인은 지방 관아나 사원에서 서울에 둔 저택의 주인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지방의 서울 연락기구로서 각 군현의 저사인 경저가 설치되고 이를 맡아서 운영하는 경주인을 두었다. 그런데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간 여러 관서의 아전이나 사령, 노예 등이 곧바로 상경하지 않으면 서울에 사는 경주인에게 독촉하고 때로는 날수를 계산하여 속전(贖錢)을 물리기도 하였으므로, 경주인의 입역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세종실록』 2년 11월 7일).

따라서 향리들은 경주인으로 차출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17세기 안동에서는 사족들이 향리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처벌이 경주인으로 보내는 벌이었다. 안동의 유향소에서 향리들의 과실을 『인리제관속기과(人吏諸官屬記過)』라고 하는 장부에 적어 두었다가 처벌하였는데, 사족들은 먼저 향리를 관에 고발하여 처벌하는 ‘고관벌(告官罰)’과 ‘경주인행(京主人行)’이라는 처벌을 실시하였다.

중종조에는 경주인의 위상을 드러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윤규(尹奎)라는 수령이 경주인을 때려죽인 일이 있었는데, 중종은 고을의 수령이 아전을 꾸짖을 일이 있어 매를 때리더라도 일반인을 때려죽인 것과는 다르다고 하여 ‘때려죽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관이 이를 일반인을 때려죽인 것으로 기록하였으므로, 폭군으로 비추어질 것을 염려하여 사초와 기록의 경위를 조사하는 소동을 벌였다(『중종실록』 24년 1월 7일). 이는 지방 수령과 경주인의 관계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경주인의 역은 괴로운 것이 되었다. 따라서 지방의 향리들이 경주인이 되는 것을 싫어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18세기 말에는 경주인을 모두 노비나 천인들이 맡아서 하였다. 그런데 점차 경주인이 하나의 권한이 되어서 중앙의 힘 있는 관서의 서리나 권문세가의 겸인이 맡게 되었다. 서울의 관리와 양반들은 경주인의 자리를 사들여 자기 하인에게 그 일을 맡기고 이익을 볼 수 있었으므로, 역가는 더욱 올라가서 큰 고을의 경우는 1만 냥이 넘고 작은 고을도 5,000냥에 이르렀다. 1862년(철종 13)의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에는 경주인의 역가는 원정(元定)인 60석 이외에는 일체 가산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세유표(經世遺表)』
  • 『목민심서(牧民心書)』
  • 김동철, 『조선후기 공인연구』, 한국연구원, 1993.
  • 이성무, 「경재소와 유향소」, 『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1992.
  • 한우근, 「이조후기 공인의 신분 -대동법 실시이후 공납청부업자의 기본성격-」, 『학술원논문집』5 인문사회과학편, 1965.
  • 김동철, 「18·19세기 경주인권의 집중화 경향과 도고 활동」, 『부대사학』13, 1989.
  • 김진봉, 「사주인연구」, 『대구사학』7·8, 1973.
  • 김진봉, 「조선전기의 공물방납에 대하여」, 『사학연구』26, 1975.
  • 이광린, 「경주인연구」, 『인문과학』7,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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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周藤吉之, 「高麗朝の京邸·京主人とその諸關係 -唐末·五代·宋の進奏院·邸吏および銀台司との關連において-」, 『朝鮮學報』111, 1984.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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