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지옥(庚申之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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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숙종 6)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로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된 사건.

개설

서인인 김석주(金錫冑)·김익훈(金益勳) 등이 남인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종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삼형제와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복창군 삼형제와 허견, 허적 등이 죽거나 유배되었고, 남인들이 축출되었다. 이 사건을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숙종 초기 정치적 급선무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왕권의 안정성 확보였다. 숙종은 삼복(三福), 즉 복창군(福昌君)·복희군(福喜君)·복평군(福平君) 형제의 종친(宗親) 세력과 김만기(金萬基)·김석주(金錫冑) 등 외척(外戚) 세력, 그리고 허적(許積) 등 남인의 연합에 의지해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왕권의 정통성을 해결했다. 그러나 숙종의 잦은 질환과 그로 인한 후사 문제는 왕권의 불안정성을 증폭시켰다. 당시 삼복 형제는 숙종 초기에 외척과 당파, 군문(軍門), 궁중까지 폭넓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수지변(紅袖之變) 이후 야기된 종친과 외척의 갈등은 왕권의 안정성 문제로 비화되었다.

전개 과정

숙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병환에 시달리자 삼복 형제는 허견과 결탁해 역모(逆謀)를 꾸몄다. 숙종과 김석주는 이런 낌새를 채고 이입신(李立身)·박빈(朴斌)·남두북(南斗北) 등에게 허적·유혁연(柳赫然)·복선군 등을 정찰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남인은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해 군권(軍權)을 일원화하고 서인의 지휘 하에 있던 중앙의 군권까지도 통제하려고 했다. 도체찰사부는 남인인 윤휴(尹鑴) 등의 주장으로 재설치되었으나, 윤휴의 의도와 달리 숙종은 김석주를 부체찰사(副體察使)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군권을 장악케 했다(『숙종실록』 5년 11월 3일).

한편 1680년 3월 28일에 허적의 조부 허잠(許潛)이 시호(諡號)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인 시호연(諡號宴)에서 허적의 아들 허견이 서인을 살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 연회에서는 궁궐 유악(油幄: 기름을 입힌 천막)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숙종은 훈련대장(訓鍊大將)에 김만기, 총융사(摠戎使)에 신여철(申汝哲), 수어사(守禦使)에 김익훈(金益勳), 어영대장(御營大將)에 김석주를 임명하고, 유혁연은 해임시켰다(『숙종실록』 6년 3월 28일).

이어서 숙종은 남인에게 미움을 받아 처벌 받은 김수항(金壽恒)을 석방하고, 파당적(派黨的) 인사를 시행했다는 이유로 이조(吏曹) 판서(判書)이원정(李元禎)을 파직시켰다. 그리고 이조 판서에 정재숭(鄭載崇),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상진(李尙眞), 도승지에 이익상(李翊相) 등 서인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4월 4일에 김수항을 영의정에, 정지화를 좌의정에 임명하여 서인 집권의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와 동시에 영의정허적과 좌의정민희(閔熙), 우의정오시수(吳始壽) 등은 자발적으로 사직했고, 유명천(柳命天)·목창명(睦昌明)·민암(閔黯) 등 남인들의 사직소가 잇따랐다(『숙종실록』 6년 3월 30일).

4월 5일에 이르러 뒤늦게 정원로(鄭元老)·강만철(姜萬鐵)이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고변하여 복선군·허견·복창군이 처형되었다(『숙종실록』 6년 4월 5일). 이어 허적·윤휴·유혁연 등에 대한 추국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허적이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나지 않자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시골로 내쫓았다. 이후 차옥(次玉) 사건에서 허견을 비호한 혐의로 사사(賜死)되었다.

또한 숙종과 김수항은 윤휴의 역모 관련 여부도 확신하지 못했다. 결국 윤휴는 역모보다는 숙종에 대한 무례한 언사와 조관론(照管論), 곧 상소에 ‘조관(照管)’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죄목이 되었고, 이후 이환(李煥)의 익명서(匿名書)에 대한 비밀 차자(箚子)로 인해 사사되었다.

한편 숙종은 예론(禮論)을 다시 거론하여 국시(國是)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이유태(李惟泰)·송준길(宋浚吉) 등을 서용했다. 이유태가 예론에서 송시열(宋時烈)이 효종(孝宗)을 적자(嫡子)로 인정했다고 변호하자, 중도부처(中途付處)했던 송시열을 석방했다. 그리고 5월 18일에 외척 세력인 김만기·김석주,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고변한 정원로, 허적 등을 정찰하도록 한 남두북·이입신·박빈 등을 보사공신(保社功臣)에 녹훈(錄勳)하여 역모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 했다(『숙종실록』 6년 5월 18일).

8월 10일에 이원성(李元成)은 정원로가 역모에 참여했다고 고변했다(『숙종실록』 6년 8월 10일). 정원로는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신범화(申範華)가 최초로 꾀했다고 폭로했다. 그러자 김석주는 석고대죄하여 자신이 주도해 꾀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친척인 신범화를 옹호했다. 하지만 대간(臺諫)에서 지속적으로 정원로와 신범화에 대해 엄한 처벌을 요청하자 정원로는 보사공신에서 삭제되고 처형되었다. 이때 오정창(吳挺昌)·유혁연 등 일부 남인들도 처형되었다.

김석주는 대신과 대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사명(李師命)·김익훈·조태상(趙泰相)·신범화·이광한(李光漢)·이원성 등을 보사공신에 추록(追錄)함으로써 경신환국은 일단락되었다(『숙종실록』 7년 5월 21일).

예송(禮訟)에서 협력했던 종친과 외척, 남인은 홍수지변(紅袖之變)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외척은 병권을 장악하고 삼복의 역모를 처리하여 왕권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되었지만, 이는 당파가 주체가 되어 획득된 것이 아니라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얻게 된 결과였다. 이원성의 고변으로 발생한 정원로의 보사공신 삭제, 추록 과정에서의 반발 등으로 경신환국의 의미는 훼손되었다.

참고문헌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강주진, 『이조 당쟁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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