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假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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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나 돌로 언덕이나 산을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한 유형.

개설

풍수에서는 제 아무리 좋은 땅도 완벽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로서 호지(好地)를 거론하기도 한다. 땅에 흠이 있으면 미를 보완하여 온전한 땅으로 만드는 방법의 하나이다. 흙이나 돌로 인공 산을 만드는데 조산(造山)이라고도 한다. 크게는 도읍지에서 작게는 묘지에 이르기까지 허결처(虛缺處)를 메움으로써 바람을 막거나 물길을 돌림으로써 좀 더 쾌적한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일종의 토목공사이다.

내용 및 특징

지기(地氣)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써 사방을 감싸는 산들 가운데 함몰된 곳 혹은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가 벌어진 곳 등에서 조성된다. 역사적으로 고려에서 크게 성행했던 비보풍수의 한 가지였으며, 1409년(태종 9) 종묘 남쪽에 가산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9년 3월 2일). 또 1444년(세종 26)에는 어효첨(魚孝瞻)이 정한 세종의 수릉 자리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선로(李善老)가 가산 쌓기를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세종실록』 26년 12월 21일).

1452년(문종 2) 풍수학자 문맹검(文孟儉)은 한양 도읍지의 풍수적 문제점, 즉 한양 수구의 취약성을 지적하며,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일종의 가산으로서 작은 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보완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상소문에는 지금 한양 수구의 안에 옛날 사람이 3개의 작은 산[小山]을 만들어 각기 소나무를 심었지만, 이 작은 산이 수구에 있지 않고서 도리어 수구의 안에 있고, 또 산이 무너져서 낮으며 소나무는 말라 죽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미 가산이 있었는데 위치가 잘못된 데다가 관리 소홀로 가산이 무너졌음을 지적하고 보제원(普濟院)의 남쪽과 왕십리역의 북쪽에 작은 산을 3개나 혹은 7개를 만들어 소나무와 홰나무·버드나무를 심어서 수구를 좁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문종실록』 2년 3월 3일). 19세기 말엽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가산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후 지속적으로 유지·관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가산은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대개는 마을 입구 수구처에 돌로 쌓은 경우가 많지만 더러는 흙으로 쌓은 경우도 있다. 또한 마을 입구 연못에 만들어진 3개의 인공섬도 비보풍수를 위한 가산이다. 무덤에서도 가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이산해(李山海) 무덤 앞의 3개의 인공섬도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풍수지리에서 의미하는 가산 말고도 정원 만들기[作庭]에도 가산이란 용어가 쓰인다. 중국 송나라 때 생긴 말로 분경(盆景)·분산(盆山)을 뜻하였으며 가산퇴(假山頹)라는 용어가 『고려사(高麗史)』에 나온다. 일종의 조원수법(造園手法)이다. 경복궁 교태전 뒷산인 아미산, 경회루 연못 가운데 있는 두 섬과 소쇄원(瀟灑園)·성락원(城樂園)의 가산 등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김현욱 외,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한양의 비보풍수에 관한 연구」, 『한국정원학회지』 통권 제41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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