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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씨]](夫餘), 이름은 의조(義照)이다. 참고로 '義'는 [[토요타]](とよた)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씨]](大內 おおうち.oouchi)와 [[토요타]](豊田とよた.toyota)씨,[[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fujiwara)씨의 시조이다.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된다. [[오우치씨]]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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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씨]](夫餘), 이름은 의조(義照)이다. 참고로 '義'는 [[토요타]](とよた)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씨]](大內 おおうち.oouchi)와 [[토요타]](豊田とよた.toyota)씨,[[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fujiwara)씨의 시조이다.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된다. [[오우치씨]]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
  
 
《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족보에만 기록된 인물인데,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좌 태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족보에만 기록된 인물인데,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좌 태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2023년 11월 9일 (목) 01:28 판

야마구치(山口 やまぐち)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大內 おおうち), 토요타씨(豊田とよた),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 스에씨(すえ)가 후예로 전해진다.

오우치 씨(일본어: 大内氏 오우치시[*] おおうち.oouchi)는 일본의 씨족 중 하나이다. 본성은 다타라씨(多々良氏), 가바네는 고니키시이다. 중세 일본의 대영주이며 센고쿠 시대 후기 모리 모토나리등에게 멸망 후에도 방계 후손들이 근세 일본 막부의 소영주 귀족 집안으로 살아남았다. 백제 왕조의 후손을 자칭하는 씨족이다.

임성태자(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ㅡ일본 서씨(日本徐氏) 시조

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씨(夫餘), 이름은 의조(義照)이다. 참고로 '義'는 토요타(とよた)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씨(大內 おおうち.oouchi)와 토요타(豊田とよた.toyota)씨,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fujiwara)씨의 시조이다.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된다. 오우치씨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

《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족보에만 기록된 인물인데,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좌 태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행적[편집]

위덕왕 붕어 1년 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에서 타타라(多々良)씨를 하사받았으며, 칠성신 신앙을 비롯해 제철기술을 전파하고, 불교를 확산시켰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쇼토쿠 태자가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고류지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탑과 백제 왕에게서 받았다는 검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임성태자(琳聖太子[1], 577년 ~ 657년 11월(오우치 가문의 주장, 생몰년도 미상))는 일본 오우치씨(おおうち)의 족보에 등장하는 남부여의 귀족으로, 조선왕조때 만들어진 간양록과 지봉유설, 난중잡록 등의 기록이 전부다. 성씨는 부여씨(扶餘), 이름은 의조(義照)다.

토요타(とよた)씨 족보 계보


오우치씨(おおうち) 족보에서의 기록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위덕왕의 아들설과 손자설이 모두 있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이라고 기록했다.

중국 《북사》에서는 무왕위덕왕의 아들로 대충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 태자가 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의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일본 토요타(とよた)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시호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섭정이나 찬탈 형태로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고려하면 법왕과 무왕 사이에 공위기가 있었고, 왜국측에서는 백제왕신사의 제사장인 그를 정통성있는 백제 국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스오국의 실무 지방 관료에서 출세하여 슈고 다이묘로서 센고쿠 다이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큰 세력을 유지했고, 한반도와의 무역 및 교류를 통해 난보쿠초 시대 및 센고쿠 시대의 상당 기간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다. 스오국, 나가토국, 이와미국, 부젠국, 지쿠젠국의 슈고직에 보임되는 등 전성기에는 6개 구니를 영유하였다.

가문 유래

일본인들은 소위 겐페이토키쓰(源平藤橘, 일본 4대 대성인 겐지·헤이시·후지와라씨·다치바나씨 후손의 총칭) 또는 그 외의 중앙 귀족의 후손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우치씨는 백제 성왕 혹은 위덕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琳聖太子)를 시조로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으로 건너간 임성태자가 스오국의 다타라하마(多々良浜) 바닷가에 도착하였으므로 스스로의 성을 다타라(多多良)라 하였다가 훗날 오우치(大內) 마을에 거주하게 되면서 오우치씨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성태자의 기록은 통일 신라 이후 현재까지의 한국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오우치 씨가 임성태자의 후예임을 자처한 최고 문헌도 14세기 이후의 것이다. 대대로 스오에서 스오노곤노스케(周防權介)를 세습했던 재청관인 집안이라는 것 외에는 확실한 근본을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헤이안 시대에서 가마쿠라 시대까지

헤이안 시대 후기인 닌페이 2년(1152년)에 발급된 재청하문(在廳下文)에 다타라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의 서명이 적혀 있다. 이것이 다타라씨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데, 이 무렵에 접어들어 재청관인으로서 큰 세력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헤이안 말기의 오우치씨의 당주로 스오의 호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다타라 모리후사(多多良盛房)가 스오노곤노스케에 임명된 이후, 오우치노스케(大內介)라는 이름을 쓰며 자신의 후손인 역대 당주들에게 이 이름을 물려주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오우치 일족은 스오의 고쿠가(國衙-지방관아)를 완전히 장악하여 실질적인 스오의 지배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막부의 고케닌(御家人)으로서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5]의 효조슈(評定衆)에 임명되기도 했다.

난보쿠초 시대

남북조 시대에 들어 당주 오우치 히로유키(大内弘幸)와 숙부 와시즈 나가히로(鷲頭長弘) 사이에 가독(家督) 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일어났고, 히로유키의 아들인 히로요(弘世)가 와시즈씨 집안을 종속시키고 나가토국(長門国)의 슈고 고토씨(厚東氏) 집안과 항쟁, 쇼헤이 13년/엔분 3년(1358년)에는 그 거점 시모후리성(霜降城)을 공략하여 고토씨를 규슈로 내쫓아 버림으로서, 오우치 씨의 세력은 스오와 나가토, 2개 구니로 확대된다. 히로요는 본거지를 야마구치(山口)로 옮기고 쇼헤이 18년/조지 2년(1363년) 북조(北朝)인 무로마치 막부에 신복했다.

히로요의 뒤를 이은 적남(嫡男)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는 규슈 단다이(九州探題)[5]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의 규슈 제압에 종군하고, 남조(南朝)와의 통합 교섭도 맡아 겐추 8년/메이토쿠 2년(1391년)에는 야마나씨(山名氏)가 일으킨 메이토쿠의 난에서도 활약하였다. 그 결과 이즈미·기이·스오·나가토·부젠·이와미의 6개 구니를 다스리는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로서 조선과도 독자적인 무역을 행하는 등(《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통교기사만 150년간 에 걸쳐 200회가 넘을 정도), 오우치 씨 집안의 최전성기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요시히로의 세력을 두려워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도발로 요시히로는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 아시카가 미쓰카네(足利満兼)와 공모해 오에이 6년(1399년)에 사카이(堺)에서 거병했다가 패하고 전사한다(오에이의 난).

요시히로 사후 영지 대부분이 요시미쓰의 차지가 되고, 스오·나가토 2개 구니의 슈고는 요시히로의 남동생 오우치 히로시게(大内弘茂)에게 넘겨져 오우치 집안의 세력은 일시 쇠퇴했다. 그러나 오에이의 난에서 영지에 남아 있던 요시히로의 또 한 명의 동생·오우치 모리미(大內盛見)가 이 결정에 반항하여 다시 가독 자리를 둘러싼 항쟁이 일어났고, 히로시게는 모리미에게 살해당한다. 막부의 명을 받고 있던 주변의 고쿠진(國人)들도 모리미에 항복하면서 막부는 모리미의 가독 계승을 인정해야만 했다.

무로마치 시대에서 센고쿠 시대까지

당주가 된 모리미는 요시히로 시절의 영화를 되찾고자 기타큐슈(北九州) 방면으로 진출했다. 료슌의 후임으로 규슈 단다이[5]가 된 시부카와 씨(渋川氏)를 대신해 기타큐슈를 맡아, 막부의 신임을 얻어 부젠의 슈고에도 임명되지만, 에이쿄(永享) 3년(1431년)에 쇼니 미쓰사다(少貳満貞)·오토모 모치나오(大友持直)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조카 오우치 모치요(大内持世, 요시히로의 유복자)는 모리미에 필적하는 인물로서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의 신임을 받아 지쿠젠의 슈고에 임명되어 쇼니씨·오토모씨를 정벌하는 등, 오우치 씨의 기타큐슈에서의 우위를 확립했다(또한 이 무렵부터 야마구치 씨의 계통이 분파하였다). 모치요는 가키쓰(嘉吉) 원년(1441년)에 일어난 전란(가키쓰의 난)에 말려들어 비명횡사했지만, 사촌동생이자 그의 양자였던 오우치 노리히로(大內敎弘, 모리미의 아들)이 그 세력을 이어받았다. 노리히로의 아들인 마사히로(政弘)는 오닌(應仁) 원년(1467년)에 일어난 오닌의 난에서는 서군(西軍)의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에 속하여 용맹을 떨쳤고, 난이 종결된 뒤 규슈에서의 재기를 꾀하여 거병을 일으킨 쇼니씨와 오토모씨 두 집안을 다시 굴복시킨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막부에도 영향을 미치는 슈고 다이묘로서의 지위도 그대로 보전하였다.

센고쿠 시대, 마사히로의 뒤를 이은 오우치 요시오키는 쇼니씨를 일시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기타규슈·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확립해 그 세력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다. 그리고 교토에서 쫓겨난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를 보호하여, 에이쇼 5년(1508년)에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國)와 협력해 요시타네를 끼고 주고쿠·규슈의 세를 몰아 교토로 상경해, 간레이(管領) 대리로서 무로마치 막부의 정치를 행하는 등 표면상 일대 세력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교토 체류는 오우치뿐 아니라 그의 휘하 고쿠진과 호족들에게도 부담이 컸고, 먼저 구니로 돌아간 아키 다케다씨(安芸武田氏)의 다케다 모토시게(武田元繁)나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 등이 오우치의 영지를 침략하는 등 배후를 위협해왔다. 대응에 고심하던 요시오키는 교토에서 돌아와 아마고 씨나 아키 다케다씨 집안과 싸웠다.

교로쿠 원년(1528년)에 요시오키가 죽자 적자 요시타카(義隆)가 가독을 이어받았다. 이 시대에는 스오뿐 아니라 나가토·이와미·아키·빈고·부젠·지쿠젠을 영유한 명실공히 서국(西国) 제일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서 오우치 집안은 중흥기를 이룩했다. 호소카와 씨 집안과도 싸워서 명나라과의 교역을 독점했으며, 학문과 예능에 힘을 쏟았던 요시타카가 크리스트교 포교를 허락하고 구게(公家)나 선교사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기에, 오우치 영내에는 독특한 야마구치 문화권(오우치 문화)이 형성되어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맞았다.

쇠퇴

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오키후사(陶興房)나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 등의 우수한 가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尼子恒久)와 손자 하루히사(晴久), 지쿠젠의 규슈 단다이[5]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후유히사(冬尚) 부자와 세력을 다투는 한편, 분고의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나 아키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등과는 몇 번의 전투 끝에 융화책을 강구했다. 특히 모리를 자신의 세력하에 종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내분이 일어난 이쓰쿠시마(嚴島)의 신주(神主) 집안 계승 다툼에도 개입한 기록이 남아있다.

덴분 5년(1536년) 마침내 쇼니씨를 다시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고, 덴분 9년(1540년)부터 10년(1541년)까지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이었던 요시다 고리야마 산성(吉田郡山城)의 싸움에 원군으로 출전, 아마고 씨를 격파하고 아마고 씨의 본거지 이즈모로 쳐들어가 일 년에 가까운 원정을 펼쳤으나, 조카이자 양자인 후계자 하루모치(晴持)와 많은 가신을 잃고 원정에 실패했다. 큰 충격을 받은 요시타카는 정무도 내버린 채 오로지 학문과 예능에만 힘을 쏟았다. 여기에 스에 다카후사를 위시한 무단파와 사가라 다케토(相良武任)를 필두로 한 문치파의 대립이 격해지는 등 오우치는 내분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결국 덴분 20년(1551년) 스에 다카후사의 모반으로 요시타카가 자결하면서(소위 다이네이지의 변) 오우치씨는 급속히 쇠퇴한다[6].

멸망

요시타카가 죽은 뒤, 스에 다카후사가 요시타카의 조카이자 양자인 오토모 하루히데(大友晴英)를 당주로 옹립하고, 그에게서 이름한 자를 받아 하루카타(晴賢)로 개명했다. 하루히데는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라 이름을 고치고 공신 스에 하루카타가 권력을 잡았다. 하루카타는 강압적으로 가문을 다스렸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집안 내 세력이 적지 않았다. 선대 요시타카의 매형인 요시미 다다요리(吉見正頼)가 이와미 산본마쓰(三本松)에서 반기를 들었고, 이 와중에 아키의 최대 세력이었던 모리 모토나리가 종속 관계를 벗어나 센고쿠 다이묘로 독립했으며 곧 스에씨 세력의 여러 성을 공략했다. 고지(弘治) 원년(1555년), 여러 번의 패배끝에 궁지에 몰린 하루카타가 아키의 미야지마(宮島)에서 모토나리의 기습공격 직전 자결했다(이쓰쿠시마 전투). 그의 죽음으로 오우치 내부는 통제력을 잃었고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고지 2년(1556년) 모토나리의 침공을 받게 된다. 가문 내부에서도 주요 가신 그룹인 스기씨(杉氏)나 스에씨(陶氏), 나이토씨(内藤氏)까지 야마구치 주변에서 서로 내분을 일으켰다. 난을 일으켰던 방계 친족 요시미씨(吉見氏)도 모리에게 항복하고 신하가 되면서 기반을 모두 잃은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는 나이토 다카요(内藤隆世)의 거성인 나가토의 가쓰야마성(且山城)으로 달아났다가 이듬해 장남 다카요와 함께 자결하였다. 이로써 적통 스오 오우치씨(周防大内氏)는 멸망했다.

분고 오우치씨

에이로쿠 2년(1559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의 친형으로서 인연을 인정하여 분고(豊後)와 부젠(豊前)의 태수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에게 규슈 단다이의 직책과 함께 오우치 씨의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문서를 하사하였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주고쿠 지방을 평정한 모리씨가 북규슈에 침공했다. 적통 오우치 씨의 방계 친족인 오우치 데루히로(大內輝弘)는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부하였는데 모리씨를 배후에서 격퇴할 목적으로 군사를 받아 스오의 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를 공격했다. 스오에서 오우치의 잔당들이 잇달아 가담하면서 야마구치를 탈환하고 다시 오우치 씨가 일어서는 듯 했지만, 오토모 씨 공략을 중단하고 기타큐슈에서 급히 되돌아온 모리군의 역습으로 결국 전멸했다. 이로서 주고쿠 서부의 오우치 씨의 잔여 세력 역시 사라졌다.

에도 시대

현재 도쿄 동쪽 이바라키 현(茨城縣)에는 에도 시대 우시쿠 번(牛久藩)이 있었는데, 대대로 번주였던 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가 오우치 씨의 방계로서 오우치 요시히로의 차남 오우치 모치모리(大内持盛)의 계통이며, 메이지 유신까지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로서 존속됐다.

일본의 백제계 성씨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

오우치씨는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琳聖太子)의 후손으로 임성태자는 추고 천황 19년에 당시 일본의 스오국이라고 불리는 야마구찌에 상륙해 타타라 라고 하는 성씨(姓氏)와 함께 오우치씨의 영지를 하사받고 거기서 영주하며 백제에서 데리고 온 제철기술자로 하여금 철을 생산하여 오우찌 지역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훗날 후손들은 오우찌 지역의 지명을 따서 오우찌 성씨를 쓰게 된다.

오우치씨(大內氏)가 어느 정도에 권력을 행사했는가 하면 전성기 때는 일본열도의 7개의 영주로써 규슈를 포함한 간사이 지역의 상당부분을 다스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크나큰 힘을 과시했었다.

이뿐만 아니라 오우치씨 가문은 14세기 무렵 야마구찌현(山口縣)에서 가장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했었고 중국과 고려 그리고 조선과도 교역을 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에서 명종까지 약 200회 이상 대내전(大內殿)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우치씨 가문이다. 이 오우치씨 가문은 일본열도는 물론이고 중국 고려 조선과도 일대일로 무역을 하고 교류를 했을 정도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백제 도래인(渡來人)의 후손인 우리의 선조이다.

오우치씨의 조상 임성태자가 추고 천황 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여러 기록에 쓰여 있는데 추고 천황 19년은 과연 언제일까? 바로 611년이다. 이때는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망하기 52년 전인데 백제의 태자가 어떻게 일본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또 거기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일본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고대 한일 관계 즉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이다. 일본의 우익이나 우익과 관련 있는 학자들은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라서 배신을 하고 일본을 위협하는 행위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백제의 왕자가 일본으로 보내어져 볼모로 잡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말은 전혀 맞지 않는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왜냐면 볼모로 인질로 잡혀간 사람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정권을 들었다 놨다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예전에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일본은 3세기 무렵부터 백제의 분국(分國)으로써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에 백제의 호족(豪族)들은 마음대로 드나들며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어떻게 오우치씨 가문이 일본의 중심이 되었을까라는 것인데 답은 바로 백제의 제철기술이었다. 임성태자가 처음 오우치씨에 왔을 때 하사받은 성씨가 타타라(多多良)라는 하는 성씨이다. 여기에는 철(鐵)이라는 뜻이 내재되어 있는데 다시 말해서 제철기술을 가지고 왔다고 해서 타타라 라는 성을 받게 된 것이고 임성태자가 가지고 온 제철 기술은 단순한 농기구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만들어 지역의 힘을 증가시켰으며 함께 부를 축척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무기는 곧 힘이고 힘은 부를 축척하는 도구였기 때문에 임성태자의 후손인 오우치씨 가문은 날로 번창했고 그 힘의 원천인 무기를 다루는 기술 또한 백제의 기술이라고 보면 정확히 맞다.

오우치씨 가문은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막강한 힘을 발휘했는데 폐위된 쇼군을 다시 복귀 시킬 정도로 정치적 군사적 힘은 대단했다.

< 大内氏実録 편찬: 1885年 출처: 일본 국립 국회도서관 >

위 문헌을 보면 타타라의 시조 임성태자는 귀화 후 지명(地名)을 따라서 성씨가 되었고 백제왕 성명의 아들이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 毛利軍功記 - 편찬 1918年 출처: 일본 국립 국회도서관 >

위의 모리군공기를 보면 오우치씨(大內氏)는 백제국왕(백제는 조선의 일부분으로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의 곳) 여장(성왕)(餘璋-성명왕(聖明王))의 末裔(마쯔에이) 즉 성명왕의 말기의 후손으로 일본으로 귀화하였다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조 4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日本大內多多良, 遣人來獻土物 )

일본 대내전(大內殿)의 다다량(多多良)이 사람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

위의 태조실록을 보면 오우치씨가 조선 조정에 토산물을 바쳤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조선과 무역을 허락하는 답례로 보내는 것이며 조공은 아니다. 다른 기록에 보면 가격이 맞지 않아 물건을 다시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간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명종 2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丙午/上接見日本國 大內殿 義隆使送僧稽囿西堂等于勤政殿, 頒賜有差 )

상이 일본국 대내전(大內殿) 의륭(義隆)의 사송(使送) 승(僧) 계유서당(稽囿西堂) 등을 근정전에서 접견하고 차등 있게 반사(頒賜) 하였다.

위 명종실록을 보면 오우치씨 가문에서 조선 조정을 방문하여 근정전에서 만났고 오우치씨 가문에서 온 사람들의 지위에 맞게 각각 다른 선물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도 상당히 많은 기록이 있지만 그 양이 방대하여 다 올릴 수 없어 태조실록의 기록과 명종실록의 기록을 올려 설명을 하였다.

위 기록을 보면 명확하게 오우찌 타타라(大內多多良)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고 오우치씨 가문이 일본 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무역을 하며 일개 국가처럼 활동을 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오우치씨(大內氏)에 대하여 알아보았지만 실은 일본 천황가는 물론 우리가 이름만대도 다 아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みなもとのよりとも), 다케다 신겐(武田信玄たけだしんげん),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とくがわいえやす), 사이고우 다카모리(西郷隆盛さいごうたかもり) 모두가 백제계 도래인이며 우리의 조상이다. 그럼 일본은 왜 그렇게 아니라고 부인을 하는가? 입장을 바꿔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 일본인이라고 치자 한국인이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 같은 맥락이다. 일본 역사 속의 인물들, 그것도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일본의 통치자들이 백제인 즉 한국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하겠는가?? 하지만 사실이다.

위의 백제의 후손들은 일본 속에서 다시 세력을 키워 새롭게 또 다른 백제를 세웠으며 백제의 모든 문물이 일본 속에서 다시 피어났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할 것이다.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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