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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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백제의 제8대 국왕이자 건길지. 고이왕의 후손들, 즉 고이왕(8대) - 책계왕(9대) - 분서왕(10대) - 계왕(12대)으로 이어지는 왕통을 고이왕계라고 부른다.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고이왕에 대한 의문

지나치게 긴 수명

백제 초기 왕들이 그렇듯 《삼국사기》 상에 기록된 생몰년은 정확성을 의심받는데 아버지 개루왕이 사망한 해인 166년에 태어났다고 쳐도 고이왕의 즉위는 234년으로 이 때 고이왕의 나이는 68세이다.

어찌어찌 좀 오래 살아서 68세에 즉위했다쳐도 고이왕의 재위기간은 무려 52년이나 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사망한 286년에는 120세가 넘게 된다.

때문에 과거에는 고이왕을 초고왕의 아우가 아닌, 초고왕의 아우의 아들, 즉 초고왕의 조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럴 경우 나이가 40세쯤 줄어들기 때문에 52년이나 재위해도 그다지 비현실적이지는 않게 된다지만, 초기 백제사의 기년은 기원후 2~3세기에나 겨우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한성백제의 역사를 무리하게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맞게 백제인 자신들이 수정했다는 게 요즘 중론이므로 이런 추측은 현재 와선 진지하게 논의되진 않는다.

개루왕-초고왕-구수왕-사반왕 계열과 계보가 다르지만 사반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후 정통성을 위해 개루왕의 아들을 자칭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 얘기는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고대인들이라고 바보가 아닌데 단순히 정통성을 위해 혈연 관계도 없는 자의 아들을 일부러 자칭한다는 건, 초기 신라사와 초기 백제사 해석에서 일각에서만 발견되는 괴이한 억측이다. 물론 유교적 종법주의가 강고해지는 훨씬 후대에 가면 정통을 위해 방계입승한 군주들이 항렬에 맞게 사후양자 입적을 행하긴 하지만, 초기 백제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

일단 고이왕 재위기 중 후반부 행적과 책계왕의 행적은 적어도 마한 목지국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고고학적 성과와 어느 정도 일치하기 시작하므로, 책계왕 재위기부터는 그럭저럭 《삼국사기》에 기록된 기년에 맞다고 볼 여지가 높다. 그렇다면 고이왕의 사망 연도에 대해선 《삼국사기》를 믿을만하지만, 실제 출생연도와 즉위연도는 《삼국사기》 기년보다 늦을 개연성이 있다.

정체에 대한 논란

심지어 백제 시조 중 하나인 우태 = 부여 위구태왕이며 위구태왕의 후손인 의려왕사돈을 맺은 것이 바로 고이왕이라는 학설도 있다. 목지국 휘하 거수국이었던 백제가 목지국을 일축해버리고 실질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고이왕 시기로 고이왕이 시조화되었다는 이야기. 고구려의 연노부 왕실을 계루부의 태조대왕이 찬탈하면서 계루부 고씨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가설처럼[* 태조대왕 때 고구려의 기틀이 잡힌 것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지만 계루부의 연노부 대체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크다. 해씨 고구려설, 태조대왕 항목 참조.] 마한의 목지국 권력을 백제의 고이왕이 잡으면서 백제 중심으로 계통을 정리했다는 식이 된다. 한편, 구태의 台 자는 ‘별 태’뿐만 아니라 ‘나 이’라는 훈과 음도 있기에 ‘구태’가 아니라 ‘구이’로 읽힐 여지가 존재한다. 위구태왕 건국설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데 건국과 엮인 중국 측 인물이 바로 요동 공손씨 정권의 태조인 공손도이다. 요동의 공손 일족은 한반도와 많이 접해 있어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데 '옛 대방 땅에 백제를 건국했다'라는 구절을 '옛 대방 땅에 건국한 나라가 백제로 발전했다'처럼 절충적으로 해석하면 얼추 맞는다.

한편, 이름인 '고이'를 중고한어로는 ko nië로 읽었는데, 이것이 건길지(鞬吉支)의 에 대응된다는 견해가 있다. 조선시대에 임금을 뜻하는 말로 긔ㅈ가 있었음이 확인되므로 "건"과 "길지"는 독립된 단어임이 확실시된다. 이를 《양서》에 나오는 경주 월성의 명칭 건모라(健牟羅, 큰마을)에 대응시켜 큰 왕으로 읽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면에 고이왕과 구태는 관련 없는 인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백제 측에서 자신들의 시조들의 출자를 부여라고 중국에서 떠들었기 때문에 중국측에서 온조의 아버지 혹은 의붓아버지로 추정되는 우태를 구태와 혼돈 했으며 이러한 오류가 반영 되었다는 것. 우태는 소서노가 추모와 혼인하기 이전의 배우자였으며 ,이 설에 따르면 구태 또한 부여의 인물이긴 했지만 후대의 인물이며 백제와는 관련 없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고이왕이 백제를 건국 했다는 중국 사서측의 증언을 반박하는 셈이다.

생애

238년 정월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피리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군악대의 시초로 보인다.

246년 위나라[* 《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이다. 당시 황제조방이었다.]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고구려는 존망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동천왕관구검에게 대패하는 비류수 전투이다. 그 틈을 타서 고이왕은 위나라의 세력권인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더불어 낙랑군과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선제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의 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246년에 일어난 전투를 기리영 전투라고 하는데 아직 한사군에 맞서 싸운 기리영 전투의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많다. 현재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의견은 3가지로 목지국, 백제의 고이왕, 신분활국이다.] 고이왕은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서진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의 영역에 자리잡았었다고 추정되는 마한의 목지국(目支國) 세력을 압도[* 고이왕의 백제가 마한 목지국의 세력을 압도하게 된 계기가 《삼국사기》 등 주요 역사서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타 문헌 및 정황상 기리영 전투와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하여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고 마한 전체의 실질적인 영도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립[* 고이왕 대에 마한 관련 기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삼국사기》의 온조왕 24~27년 기록의 원래 연대를 고이왕 대로 추정한 것. 고고학적으로는 《삼국사기》상 고이왕~책계왕 재위기에 천안 청당동의 마한 목지국 세력이 갑자기 큰 쇠락을 경험하는 것으로 분석된다.]했다. 현재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동예가 자주 침범해오자 동예와 우호 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군 및 대방군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260년 봄 정월,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6좌평 제도를 두고 관등을 16품계로 나눠 정비했으며 관직의 위계에 따라 자색, 비색, 청색으로 다른 옷을 입게 하고 귀족에 대한 을 정하는 등 공복 제도를 정했는데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백제가 부족 연맹체에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다만 고이왕의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왕 대의 것이 고이왕 때로 앞당겨져 기록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6좌평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들은 같은 시대 중국의 제도보다 발전된 것이기 때문. 물론 지나친 확대 해석은 피해야 하지만 백제가 중국에서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그걸 감안하면 중국의 것보다도 앞선 통치 체제를 운영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록을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6좌평의 명칭은 후대에 가서 나오고 6좌평에 들어가지도 않는 좌평 명칭인 상좌평이 나오기도 하며 기록이 부실해서일 수도 있지만 고이왕 대에 확인되는 좌평이 2명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로 교과서에서도 6좌평 제도를 마련한 왕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그냥 백제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식으로만 언급한다.]

260년 서해의 큰 에서 사냥을 하며 직접 40마리의 사슴로 쏘아 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열식에서는 날아가는 기러기 1쌍을 활로 쏘아 맞혔다고 한다.]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갔다는 기록을 보아 사냥을 통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인재를 선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걸로 보이며 자신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율령(형법과 행정법)을 반포하고 내정을 크게 정비했는데 고이왕 때 정비된 체계가 백제의 멸망 때까지 정확히 400년[* 260~660년]간 이어지게 된다. 백제는 정확한 율령 반포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삼국사기》 고이왕 29년(서기 262년)에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하게 하라고 명령했다'라는 기록을 율령 반포의 근거로 보아 교과서에서는 고이왕 때 율령 반포를 했다고 가르친다.

고이왕은 재위 기간 내내 괴곡, 봉산을 중심으로 자주 신라와 충돌했으나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는데, 해당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적어도 분서왕 ~ 비류왕 재위기일 가능성이 높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는 시기는 한참 뒤인 기원후 4세기이기 때문이다. 일단 적어도 고이왕 때까지는 목지국이 위신이 추락하긴 했어도 여력은 보존하던 때이고, 백제의 직접 지배지 전진은 목지국이 위치한 충남 일대에서 더뎌지는 한편 전북 서해안으로 더 깊게 내려갈 정도기에, 적어도 그때는 백제군이, 백제에게 완전히 복속하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는 목지국을 타넘어 진한 지역까지 나타날 시기는 아니었다.

물론 백제가 고이왕 시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내치의 정비 및 확장에 힘입어 한강 유역을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에서 목지국을 무력화하고 목지국 휘하에 있던 충청도 마한 거수국들을 흡수하면서 충청도 북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해 사로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진한 소국들과 마찰을 빚게 되지만, 적어도 고이왕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상황이 아니었다.

기타

* 기록상으로는 고이왕이 즉위한 년도에 중국 대륙에서는 촉한제갈량오장원에서 죽었다.[* 그러나 실제 그랬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 고이왕-책계왕-분서왕-계왕에 이르는 고이왕계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계왕 이후 고이왕계는 초고왕계에게 밀려 왕위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역사학자 노중국은 고이만년, 고이해와 같은, 고이(古爾)가 들어간 인물들과 고이왕을 연관짓는 의견을 냈지만 확실하지 않다.[* 노중국,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 이들의 이름이 모두 고유어 "큰"을 음차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 백제에서 우씨(優氏)로 보이는 인물들은 고이왕 대 내법좌평 우두(優豆),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11대 비류왕의 동생이자 반란자인 내신좌평 우복(優福), 25대 무령왕 대 달솔(達率) 우영(優永) 등으로 주로 고이왕계가 세력이 가졌을 때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왕의 동생이 2명이나 있기 때문에[* 우두 또한 왕족으로 보인다.] 이에 근거해 고이왕계는 사실 왕성이 우씨(優氏)로 온조왕계의 부여씨(扶餘氏)와는 다른 비류 시조설과 관련있는 왕가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 쓰다 소키치가 정립한 “태고내”. 고구려의 태조대왕, 백제의 고이왕, 신라의 내물 마립간 시대에 각각 세 나라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했다는 학설에 한 축을 당담하는 백제의 국왕이다. 이러한 관점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불을 짚혔으며, 그의 서울대학교 제자인 이병도, 또 그 이병도의 제자들인 노태돈, 노중국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물론 《삼국사기》 기록의 기년과 기사들을 전부 무리하게 신뢰했던 과거의 학설은 문제가 많았지만, 쓰다 소키치의 학설은 그 이병도, 노태돈, 노중국 그리고 이 거두들에게 배운 한국 학자들에 의해 많은 부분 극복되고 부정되며 수정된 것 또한 사실이다. 고이왕 이전 기사 및 내물왕 이전 기사들의 사실성까지 모조리 부정하던 학설 또한 현재 와선 극복된 지 오래인 옛날 사관에 불과하다.

삼국사기 기록

[include(틀:삼국사기)] [고이왕 본기] 一年 고이왕이 즉위하다 三年冬十月 서해에서 사냥하다 五年春一月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五年春二月 부산에서 사냥하다[* 지금의 부산광역시가 아니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로 추정.] 五年夏四月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다 六年春一月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5월에 이르러 내리다 七年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다 七年夏四月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七年秋七月 석천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九年春二月 남쪽의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다 九年夏四月 숙부 질을 우보에 임명하다 九年秋七月 서문 밖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다 十年春一月 큰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다 十三年 여름에 가뭄이 심하여 보리가 죽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오다 十四年春一月 남쪽 제단에서 제사지내다 十四年春二月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다 十五年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다 十五年 창고를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十六年春一月 태백성이 달을 덮다 二十二年秋九月 신라와 괴곡의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다 二十二年冬十月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春一月 큰 가뭄이 들다 二十五年 말갈의 추장 나갈이 말을 헌상하다 二十六年秋九月 상서러운 구름이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오르다 二十七年春一月 육좌평 등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누어 보게 하다 二十七年春二月 품계에 따라 관복을 제정하다 二十七年春三月 왕의 동생 우수를 내신좌평에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一月一日 남당에 앉아 정무를 처리하다 二十八年春二月 진가를 내두좌평에 임명하고 다른 좌평도 함께 임명하다 二十八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二十九年春一月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하는 관리를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다 三十三年秋八月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다 三十六年秋九月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三十九年冬十一月 신라를 공격하다 四十五年冬十月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五十年秋九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五十三年春一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五十三年冬十一月 고이왕이 죽다

대중매체에서

* 웹툰 <삼국전투기>에서는 비류 전투 설명에 앞서 한반도 정세를 소개할 때 등장한다. 고구려와 더불어 제대로 된 군복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백제군 군복 색은 적색과 흰색 조합. 이후 비류 전투 (2)편의 타이틀 컷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았으며, 본격적으로 주변국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고 언급된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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