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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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병자호란에 앞서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남한산성을 개축했는데, 그 때 성을 견고하게 쌓아 병자호란의 격전에도 무너지지 않게 한 이서(李曙)의 공을 추모해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이서를 배향하였다.

다른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있다. 1465년(세조 11) 그 지방 주민들의 원에 의해 창건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불을 질러 소실되었던 것을 1603년 충청감사 유근(柳根)의 청에 의하여 중건하였다.

2월과 8월에 날을 가려서 향을 하사하고 광주유수와 직산군수에게 명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헌관은 제의 절차에 따라 다르다. 관찰사가 참제했을 때는 관찰사가 초헌관이 되며, 조정에서 제관을 파견했을 때는 견제관(遣祭官)이 초헌관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광주유수와 직산군수가 초헌관이 된다.

축관은 그 고장의 교수가 되고, 제관은 그곳 유생 중에서 선발하였다. 찬품(饌品)은 종사의 예에 속해서 변(籩) 10, 두(豆) 10, 조(俎) 2, 보개(寶蓋) 각 2, 작(爵) 3, 희준(犧尊) 2, 상준(象尊) 2, 산뢰(山壘) 2로 되어 있다.

조정에서 제관을 보내 제사를 지낸 예는 극히 드물지만, 문헌 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해 있으면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보내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질고(疾苦)를 덜어주도록 치제(致祭)했고, 1688년숙종이 제관을 보내서 음우(陰祐)를 빈 일이 있다.


직산현(稷山縣)은 본래 위례성(慰禮城)이다. 백제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직산현(稷山縣)에 도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다. 백제(百濟)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의 사당인 온조왕묘(溫祚王廟)가 직산현의 동·북쪽 사이 5리에 있다. 세종 11년 기유 7월에 비로소 온조왕묘(溫祚王廟)를 세우고,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 백제 시조(百濟 始祖) 온조왕(溫祚王)이 18년 계묘에 국도(國都)를 직산현(稷山縣)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13년 을묘에 이르러 온조왕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보니 한수(漢水) 남쪽의 땅이 기름지고 걸으니, 마땅히 여기 광주목(廣州牧)에 도읍을 세워서 장구한 계교를 도모하고자 하노라.”하고, 드디어 한산(漢山) 아래에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며 궁궐을 짓고 14년 병진 정월에 도읍을 광주목(廣州牧)으로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였다. 1429년 5월 7일 호조에서 충청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이제 하교(下敎)를 받자와 백제 시조(始祖)의 묘우(廟宇)를 이미 직산현(稷山縣)에 세웠으니, 청하건대 평양부(平壤府)의 기자전(箕子殿)에 따라 본 고을의 노비(奴婢) 각 2인을 정하여 이를 지키게 하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1437년 3월 13일 예조에서 여러 도의 순심 별감(巡審 別監)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악(嶽)·해(海)·독(瀆)·산천의 단묘(壇廟)와 신패(神牌)의 제도를 상정하기를“나라에서 행하는 직산현(稷山縣)의 백제 시조는 중사(中祀)이고, 사묘(祠廟)의 위판(位版)은 백제 시조라 쓴다.”하였다. 1451년 9월 16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충청도(忠淸道) 직산(稷山)에 있는 백제(百濟) 시조묘(始祖廟)가 해가 오래 되어 무너져 허물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소재지인 직산과 각 고을로 하여금 협력해 수즙(修葺)하게 하소서.”하니, 문종이 그대로 따랐다.1603년 6월 1일 충청 감사 류근(柳根)이 백제(百濟)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왕릉을 직산(稷山) 땅에 세우자고 청하니, 선조가 따랐다.

1636년 12월 25일 예조가 아뢰기를, “온조(溫祚)가 이 곳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옛 사람은 군사작전을 벌이며 주둔할 때에 반드시 그 지방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대가가 머물러 계시면서 성황(城隍)에도 이미 사전(祀典)을 거행했는데, 온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따랐다.1639년 2월 2일 남한산성에 사당을 세워 온조왕(溫祚王)을 제사하고 위판(位版)을 고쳐 써서 ‘백제 시조왕(百濟 始祖王)’이라 칭하였다.예조에서 ‘우리나라의 사서(史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모두 온조왕(溫祚王)으로 썼는데, 세대가 멀어져서 명호 및 시호를 분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거하여 위판에 쓰자고 했는데, 인조가 답하기를, “온조는 이름인 듯한데, 위판에 바로 쓰는 것이 어떠한가?”했다. 예조가 ‘백제 시조(百濟 始祖)’라고 쓰기를 청하니, 인조가 ‘왕(王)’자를 더 써 넣도록 명하였다. 1674년 1월 21일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앞으로 능에 거둥하실 때 남한산성을 숙소로 삼으셔야 하는데, 성 안에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사당이 있으니 제사를 올려야 할 듯합니다.”하니, 현종이 유사에게 이르라고 명하였다.1695년 4월 17일 숙종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역대 시조(始祖)의 제향(祭享) 축문의 칭호(稱號)를 바로잡도록 하였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건의(建議)하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온조왕(溫祚王) 제사 축문(祝文)에 온왕(溫王)이라 칭하였는데, 만일 그 성(姓)을 들어서 칭한다면 마땅히 고(高) 자를 칭하여야 하고, 만일 그 당시의 고질(古質)한 칭호를 따라서 그 이름을 든다면 마땅히 온조왕(溫祚王)이라 칭하여야 하며, 만일 그 이름을 바로 거명하는 것을 꺼린다면 백제 시조왕(百濟 始祖王)이라 칭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름의 한 글자만 따서 온왕(溫王)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사리(事理)에 있어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청컨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상세히 의논하여 바로 고치도록 하소서.”하였다.

1754년 3월 6일 영조가 승지를 보내어 남한(南漢)에 있는 온조왕묘(溫祚王廟)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1763년 5월 30일 영조가 광주 부윤 김응순(金應淳)에게 온조왕묘(溫祚王廟)를 중수(重修)하라고 명하였다.1795년 9월 18일 정조가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묘호(廟號)를 숭렬전(崇烈殿)이라 하였다. 광주 판관(廣州 判官)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광주부(廣州府)에 백제 시조의 사당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이 없으니 사체상으로 외람스럽기만 합니다.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이나 평양(平壤)의 숭령전(崇靈殿)과 같은 예에 의거하여 예문관으로 하여금 편액(扁額)의 이름을 정하게 한 뒤 광주부에서 써서 편액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역대 후왕(后王)을 제사지내는 곳에는 모두 부르는 이름이 있으니, 예컨대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이나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숭령전(崇靈殿)이나 신라(新羅) 시조의 숭덕전(崇德殿)이나 고려(高麗) 시조의 숭의전(崇義殿) 등이 바로 그 것이다. 그런데 유독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껏 전호(殿號)가 없다니 이는 흠이 되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공사(公私) 간의 문적(文跡)에 이름을 가지고 임시로 일컫는 것은 외람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일단 그런 줄 안 이상에는 즉시 바로잡아 고쳐야 마땅하니, 숭렬전이라는 칭호로 문헌비고(文獻備考)와 대전통편(大典通編)·오례의(五禮儀) 등 책을 즉시 세보 개정(洗補 改正)토록 하라. 그리고 마침 연석(筵席)에서 하교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숭렬전의 편액은 대신에게 명하여 쓰도록 하고, 편액을 거는 날에는 수신(守臣)을 보내어 제사지내 주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짓겠다.”하였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백제왕 계보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1]]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충화 팔충제(忠化八忠濟)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팔충사(八忠祠) 일원에서 백제 말의 8충신과 황산벌싸움에서 전사한 5천 결사대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올리는 제사로 매년 10월 초 백제문화제와 함께 열린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

매년 양력 5월 개최되는 행사로서 조선시대 봉건제도의 학정에 대한 순수한 농민의 개혁혁명운동의 발상지로서 근대화를 앞당겼고 민족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의미있는 행사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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